야당 밀어붙이고, 여당은 퇴장…‘양곡법’ 거부권은 예정된 운명

엄지원 2023. 4. 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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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15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농해수위) 법안심사소위원회 속기록에 남겨진 여야 위원들의 회의 장면 일부다.

이 회의는, 지난 4일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해 정국의 뇌관으로 떠오른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새 정부 들어 처음으로 진지하게 논의된 자리였다.

이후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농해수위 안건조정위원회와 전체회의 등을 바로 통과했고, 21대 국회 첫 본회의 직회부 법안이자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1호 법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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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본회의장. <한겨레> 자료사진

“아니, 합의를 해야지, 그렇게 일방적으로 하면 어떻게 합니까?”(박덕흠 국민의힘 의원)

“이게 어떻게 일방적이에요? 2시간 동안 논의를 했는데요!”(김승남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런 국회가 어디가 있냐고, 이게!”(홍문표 국민의힘 의원)

지난해 9월15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농해수위) 법안심사소위원회 속기록에 남겨진 여야 위원들의 회의 장면 일부다. 이 회의는, 지난 4일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해 정국의 뇌관으로 떠오른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새 정부 들어 처음으로 진지하게 논의된 자리였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9명의 여야 소위 위원 가운데 쌀 초과생산량을 정부가 사들여 쌀값 안정을 꾀하자는 법안의 근본 취지에 반대하는 이는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린 지 두어 시간 만에 민주당 소속인 김승남 소위원장은 속전속결로 거수 표결을 밀어붙였다. 소위는 그해 8월31일 제안된 신정훈 민주당 의원의 개정안을 포함해 7개 개정안을 이날 회의에 올렸는데,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는 여당의 반발 속에 이들을 병합한 위원회 대안이 통과됐다. 수요 대비 초과생산량이 3%를 넘기거나 쌀값이 전년 동기 대비 5% 이상 내려갈 경우, 정부가 쌀을 의무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야당이 입법을 밀어붙인 양곡관리법이 대통령실을 경유해 조금의 지체도 없이 국회로 되돌아온 입법 과정은, 지난 정기국회부터 중재와 협상 노력 없이 줄곧 극한 대결로 치닫는 여야의 정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민주당이 농해수위 소위에서 양곡관리법을 일방 처리한 것은, 그 하루 전인 지난해 9월14일 이재명 대표가 쌀값 문제를 언급하면서다. 이 대표는 당시 지도부 회의에서 당 정책위원회에 “쌀값이 2016년 이래 가장 낮은 가격으로 폭락했다는데, (쌀) 시장격리 제도를 정부가 안 하는 이유는 뭐고, 민주당의 대책은 뭔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당대표의 한마디에 거대 야당의 ‘급발진’ 드라이브가 걸린 것이다. 이후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농해수위 안건조정위원회와 전체회의 등을 바로 통과했고, 21대 국회 첫 본회의 직회부 법안이자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1호 법안이 됐다.

의석수로 밀어붙이는 거야를 설득할 책임이 있는 소수 여당 역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여야의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쟁점 법안의 경우 통상 여당이 야당을 회유할 ‘당근’을 내놓고 정부와 조율하며 막후 협상을 이뤄내지만, 국민의힘의 경우 ‘회의장 퇴장’ 전략, ‘이재명 방탄’ 주장으로만 일관했다. 2015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국회 상임위의 상시 청문회 개최를 뼈대로 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시사했을 때, 여야 지도부는 청와대 쪽이 우려하는 개정안의 ‘독소조항’을 해소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러나 이번에 국민의힘은 막후 조율에 나서긴커녕 되레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엄호하는 데 급급했다. 민주당 주도로 본회의에 직회부된 간호법, 의료법, 방송법 제·개정안 등을 놓고도 여야는 같은 길을 밟아 나갈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정치적 숙성’의 시간을 가졌던 전례조차 사라졌다. 박 전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때도 본회의 통과 이후 한달여의 시간을 가졌지만, 윤 대통령은 양곡관리법이 국회 본회의에 오르기도 전에 거부권 행사를 시사했고, 지난달 23일 본회의 통과 뒤 12일 만에 국무회의에서 이를 심의·의결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야당의 눈치를 본다거나, 여론을 의식한다는 최소한의 신호조차 주지 않는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이라고 말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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