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 던져 ‘자유평등 세상’ 외친 광야의 소리꾼이셨죠”

한겨레 2023. 4. 5. 19: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고 김병균 목사를 추모하며

고 오종렬 선생과 필자, 고 김병균 목사가 2006년에 찍었다.(왼쪽부터) 장헌권 목사 제공

안병무 함석헌 선생 영향 받아
1978년 늦깎이로 신학대 입학
전남도청, 광화문, 팽목항 등서
민주주의 지키는 거리의 목회자
보안법과 집시법 위반 옥고도

“약자 따듯하게 보듬은 사제”

평생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았던 김병균 목사.

그는 1948년 1월6일 전남 강진군 강진읍에서 태어났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거친 숨 쉬면서 외치다가 떠났다. 폐렴으로 지난 2월 병원에 입원했다가 조금 회복이 되어 퇴원했다. 아직 쌀쌀한 날씨에도 3월1일 나주에 있는 독립투사 하강 김철 선생 묘소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 참석했다. 찬바람 가운데 숨을 헐떡거리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거기서 목이 터지도록 윤석열 정권의 친일망국 행적을 질타했다. 이후 광주 고려인 마을에서 고려인 후손들 손을 잡고 목청껏 만세를 외쳤다. 결국 폐렴과 독감으로 병원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다가 지난 3월30일 별세했다.

고인은 어린 나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민주주의 외침 들으며 자랐다. 잠시 강원도 속초우체국에서 머물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정신적인 스승을 만났다. 강진약국 황호신 장로 통해 알게 된, 안병무 박사가 만든 신학지 <현존>과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가 마중물 되어 민중신학을 마음에 담아두게 된 것이다.

1978년 늦깎이로 장로회 호남신학교에 입학하면서 필자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1980년 신학도로서 민주주의 꽃피우기 위해 스러진 꽃들과 함께 전남 도청과 망월동에서 골고다 어둠의 언덕을 넘고 넘어 십자가 길을 걸었다. 그 뒤로도 광화문, 팽목항, 강정 등에서 온몸으로 민주주의 살리는 길을 걸으며 작은 예수의 길을 따랐다. 그뿐만 아니라 목회자로서 척박한 땅 갈릴리라고 할 수 있는 장성, 장흥, 신안 도초, 나주에서 ‘강도 만난 농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논두렁 밭두렁 다니면서 농산물 수입반대, 수세폐지 등을 거침 없이 외쳤다.

고인은 조국통일의 길에서 외세 몰아내고 자주 민주 통일된 세상 만들기 위해 투쟁하다가 보안법, 집시법으로 감옥에 갇혔다. ‘사람꽃’ 사랑하여 인권의 봄바람이 불어오도록 양심수와 농민, 학생, 성 소수자, 세월호 가족, 일제 때 강제동원된 할머니 곁에 늘 함께했다. 현장과 법정에서 길거리 신학 배우며 실천하는 거리의 사제로 분신으로 시들어간 ‘꽃’ 눈물로 안아주고 사랑하는 양들의 영혼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성경책 다 닳아지도록 읽고 읽으며 생활과 실천으로 사랑의 길 걸었다.

고인은 사회와 교회를 하나로 보면서 총회와 노회에서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독교’를 향해서 생명, 정의, 평화, 창조 보존을 외치고 외쳤던 광야의 예언자다. 불타는 심정으로 한국교회를 깨우는 새벽의 파수꾼 길을 외롭게 걸으며 의로운 광야의 소리가 되었다.

세례요한의 길에 자유평등 세상을 꿈꾸는 사회복음주의자의 길 45년을 하루같이 기도와 말씀으로 걸었다. 특히 고인은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보다 경건하며,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보다 똑똑하고, 순복음보다 뜨거운 균형 있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낮은 자, 힘없는 자, 소외되고 헐벗고 병든 자를 안아주는 따뜻한 목자였다.

2013년 국정원 불법대선 개입 진상규명을 위해 필자가 고인(왼쪽)과 함께 삭발하는 사진이다. 장헌권 목사 제공

2018년 은퇴 뒤 교회 울타리를 떠나 더 넓은 강단으로 가는 박사학위 논문을 책(<한반도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민중신학과 마르크시즘 및 주체사상간의 대화>)으로 발간했다. 광야의 소리꾼 김병균 목사는 윤석열 정권의 검찰독재와 굴욕외교를 규탄하러 광주 촛불행동 동지들과 함께 매서운 추위에도 서울을 빠짐없이 다녔다. 어느 날 옷을 두툼하게 입고 사모님에게 “나는 서울 촛불 갈 것잉께 내가 죽으면 나랏일로 죽었다고 말해주소잉” 하고 말했다. 그렇게 몸 아끼지 않고 망가져 가는 조국에 온몸 바쳤다.

고인은 다시 병석에 눕기 전 ‘광야의 소리’가 필요한 지금 이때 “산자는 따라서 외쳐라”를 남기고 앞서서 나갔다. 이제 우리가 일어서야 할 때이다. 봄이 되어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야 봄이 온 것이다. 여전히 우리 조국은 겨울공화국이다. 이 땅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 평화 통일의 꽃이 피는 그 날까지 광야의 소리는 계속 진행형이다.

장헌권/호남신학교 동기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