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칼자루 쥔 WH "로열티 더 달라"… 산업부·한수원, 미온적 대처
경쟁했던 폴란드도 WH가 수주
美, IRA·칩스법 이어 또 뒤통수
4월말 한미 정상회담서 풀어야
작년 5월 한·미 정상회담 당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원자력 협력을 더욱 확대하는 한편 수출 진흥과 역량개발 수단을 공동으로 사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상은 정 반대였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체코 원전 수출을 미 연방정부에 신고했으나, 미국 에너지부는 지난 1월 원전 수출 통제를 이행할 의무가 미국 기업(웨스팅하우스)에 있다는 이유로 반려시켰다. 앞서 반도체와 배터리 등 전략 산업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해놓고 뒤로는 반도체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한국 기업을 압박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는 철저하게 자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협력 논의해놓고 뒤로는 소송, 합의 외엔 답 없어= 미 에너지부가 한수원의 신고를 반려한 근거는 한수원의 특정 원전 기술이 수출통제 대상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미 연방 규정 제10장 제810절에 따르면 수출통제 대상으로 지정된 특정 원전 기술을 외국에 이전할 경우 에너지부 허가를 받거나 신고할 의무가 있다. 에너지부는 한수원에 보낸 서한에서 "규정에 따라 에너지부 신고는 미국인(법인)이 제출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신고해야 받아주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웨스팅하우스는 작년 10월 미국 에너지부의 승인 없이 진행되는 폴란드, 체코, 사우디아라비아로의 'APR1400' 판매를 금지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이 회사는 한수원의 원전 모델 APR1400이 웨스팅하우스가 2000년 인수한 CE(컴버스천엔지니어링)의 원자로 '시스템80' 디자인을 참고해 개발됐다고 주장했다.
현 시점에서는 소송에 합의하지 않는 한 한수원으로선 체코 원전 수주에서 불리한 상황이다. 웨스팅하우스 측 주장의 진위 여부를 떠나 미 에너지부가 반려했다는 점 자체로도 체코 정부가 한수원을 선택하는 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폴란드의 400억달러 규모 원전 건설 1단계 수주전에서도 미국 측의 발목잡기로 우리와 경쟁했던 웨스팅하우스가 선정된 바 있다.
상황을 종합하면 웨스팅하우스가 미 에너지부에 수출 신고를 해야 잡음이 없어지고, 이를 위해서는 한수원이 체코 정부가 사업자 선정을 하기 전에 웨스팅하우스와 합의를 해야 한다. 2009년에도 한수원은 아랍에미리트(UAE) 원전을 수주할 당시 비슷한 상황에 처했고, 기술자문료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분쟁을 마무리지었다.
칼자루는 웨스팅하우스가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수원 측은 아직 사업자 선정까지 1년 가량 남았고 분위기도 나쁘진 않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애가 타는 쪽은 한수원이다. 웨스팅하우스 사장단은 한·미 정상회담 직후인 작년 6월 방한해 한국전력, 한수원과 함께 해외 원전사업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그리고 네 달 뒤 한수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좋은 분위기라고 볼 상황은 절대 아닌 셈이다.
◇사사건건 '딴지' 웨스팅하우스= 1886년 에디슨의 라이벌 발명가인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설립한 웨스팅하우스는 원전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업체다. 세계 원전의 절반 가량을 웨스팅하우스가 지었다. 국내 상업용 원전 1호인 고리 1호기도 웨스팅하우스의 기술 지원하에 건설됐다.
방송·엔터테인먼트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던 웨스팅하우스가 원전 시장에서 몰락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다. 이 사고로 미국에서 신규 원전 건설이 거의 중단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결국 웨스팅하우스는 1998년 원전 사업을 영국 BNFL(핵연료공사)에 매각했으며, BNFL은 다시 2006년 도시바에 사업을 팔았다.
당시 시장평가액의 두배에 달하는 54억달러에 원전 사업을 인수한 도시바는 2017년 건설 중인 미 원전 두 곳의 공기 지연과 막대한 추가 공사비용으로 인해 2017년 3월 미 뉴욕 남부지방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다. 2022년 10월 도시바의 원전 사업을 79억달러에 인수한 건 캐나다 사모펀드 브룩필드와 우라늄 연료 공급업체 카메코 컨소시엄이다. 캐나다는 원전 시장에서 글로벌 플레이어 국가 중 하나다.
웨스팅하우스의 원전 원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 원전 설비업체인 두산에너빌리티 등이 한때 인수를 추진하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웨스팅하우스는 한전·한수원과 동유럽 등 글로벌 신규 원전 시장에서 경쟁 중이다. 특히 원전 특허를 앞세워 사사건건 딴지를 걸고 있다. 이번 체코 원전 수출 제동에는 웨스팅하우스 지분의 51%를 보유한 사모펀드 브룩필드가 지분 매각 과정에서 회사 가치를 부풀리려는 전략의 일환이라는 분석도 있다.
◇IRA·칩스법 이어 또 뒤통수…정부는 "기업 문제일뿐"= 체코 원전 수주에 이같은 암초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4개월이나 지난 5일 언론 보도로 알려진 점에 대해 업계는 정부의 통상 능력에 구멍이 뚫린 것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SK와 현대자동차그룹 등의 미국 투자에 "땡큐"로 화답했지만, 이후 IRA를 기습 발의해 자국 이기주의의 본색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는 뒤늦게 항의했고 이에 미국 정부는 "한국측 우려를 잘 알고 있다"면서도 아직까지 보조금 대상에 확실히 포함시킬지에 대해서는 확답을 피하고 있다.
이에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SK, LG 등 주요 기업들은 미국 관료 출신을 영입하는 등 자체 로비 능력을 키우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달 말 있을 한·미 정상회담 의제로 원전 협력 문제도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박정일기자 comja7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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