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불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드라마 제작 현장 가이드라인 제정
고 이힘찬 프로듀서 '업무상 스트레스'로 사망 후 1년 2개월 만
최소 9개월 이상 사전 제작 기간 보장, 방송 종료 시점부터 최소 1개월 휴식기간 보장 등 구체적 이행 방안 명시해
[미디어오늘 윤유경 기자]
스튜디오S가 최소 9개월 이상 사전 제작 기간을 보장하고, 방송 종료 시점부터 최소 1개월의 휴식 시간을 보장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드라마 제작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SBS 드라마 '소방서 옆 경찰서' 제작 총괄로 일하다 지난해 1월30일 숨진 고 이힘찬 프로듀서의 사망 원인 규명을 위한 노사공동조사위원회(조사위)가 조사를 마무리한 후 약속한 이행 사안 중 하나다.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노조)는 지난 3일 노보를 통해 드라마 제작 가이드라인 내용을 공개했다. 노조는 “'다시는 제2의 힘찬이가 나오지 않게 해달라'는 유족의 뜻에 따라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쉴 권리 등 최소한의 노동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고 이힘찬 프로듀서는 2012년 SBS에 입사해 드라마본부 분사 후 2020년부터는 스튜디오S 소속으로 일했다. 사망 당시까지 SBS 드라마 '소방서 옆 경찰서' 제작 총괄을 맡았고, 촬영 20여일만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스튜디오S 고 이힘찬 PD 사망사건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고인이 생을 마감하기 전날 그가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보낸 SNS 메시지에는 “모든 게 버겁다”고 적혀 있었으며 그 위에는 모두 업무에 관한 기록 문서가 남겨져 있었다.
'소방서 옆 경찰서'는 화재와 범죄에 대응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조사위는 “화재, 폭파신이 거의 매회 등장하는 데다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각종 특수 장비, 특수 효과 사용 등에 따라 제작 과정에서의 변수도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고인의 사망이 업무상 스트레스에 의한 것임을 명확히 했다. 고인은 주변 동료 등에게 “내가 촬영이 끝날 때까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 “뇌가 정지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는 등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토로하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소 9개월 이상 사전 제작 기간 보장, 촬영 개시 20일 전 예산 확정 회의 개최
지난 1일 제정된 드라마 제작 가이드라인에는 드라마 제작 전과 후, 제작 중으로 시점을 나눠 각 시점별로 노동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 등이 담겼다. 지난해 11월 조사위가 펼쳐낸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고인은 부족한 예산 범위 내에서 작품을 완수해야 한다는 압박과 함께 촉박한 편성 일정에 제작을 마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꼈다. 본격적인 촬영 돌입 이후에는 돌발 변수들이 더해져 혼자의 힘만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렸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앞으로는 첫 방영일로부터 최소 6개월~12개월간의 사전촬영기간을 보정할 수 있도록 편성 시기를 확정해야 한다. 촬영 전 준비 기간은 최소 3개월을 보장한다. 캐스팅 변경 및 대본 수급 차질 등 중대한 변동 사항에도 불구하고 편성일 조정이 불가한 경우, 회사는 B팀 조기 투입 등 안정적인 촬영 여건이 조성될 수 있도록 연출, 프로듀서와 최대한 협의해야 한다.
자체 제작 프로그램 예산 편성 및 확정 및 집행 보고 절차도 명시했다. 프로듀서는 프로그램 편성 일자 및 방영 플랫폼, 대본 1~4부 및 기획안, 주출연자에 대한 캐스팅, 용역 및 스텝 계약 등의 사항들이 확정된 후 1차 예산안을 촬영 개시 45일 전까지 회사에 제출해야 한다. 1차 예산안을 바탕으로 촬영 개시 30일 전까지 '예산 타당성 검토 회의'를 개최해 심의 조정 해야 한다.
조정된 1차 예산을 바탕으로 촬영 개시 20일 전까지 '예산 확정 회의'를 개최한다. 본 회의 개최 전 제작비 조달을 위한 저작권 판매전략을 경영사업국장 주관으로 확정하고, 최종 합의된 예산에 대해선 주요 요소별 책정 결과를 포함해 품의를 통해 확정한다. 매월 집행된 제작비에 대한 결과를 프로듀서는 매월 정산 시점에 담당 CP 및 제작리소스 팀장에게 보고해야 하며, 제작비의 초과가 예상될 때는 즉시 보고 후 추가 예산을 배정하는 품의 절차를 거쳐 배정받아야 한다.
제작시 근무 및 휴식보장 방안도…'번아웃 휴가제' 시행
가이드라인은 제작진 보호와 프로그램 제작 인력 배정 원칙도 명시했다. 번아웃 휴가제(긴급휴가제)를 도입해 직원이 심신 미약에 의해 번아웃 휴가제를 요청하거나 고충상담 결과 번아웃 휴가제가 필요할 경우 직원은 업무에서 즉각 배제하고 인사위원회 심의를 거쳐 1개월간의 병가를 즉각 허가해야 한다. 해당 병가는 심리상담을 거쳐 3개월까지 연장할 수 있다.
프로그램 제작 인력 배정 시에도 회사는 전작 방송 종류 시점부터의 휴식 기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연출, 프로듀서, 조연출, 기획PD는 최소 1개월의 휴식 기간을 부여받을 수 있다. 프로그램 구성원 중 전작에서 직장 내 괴롭힘 등의 사실이 있을 경우, 조연출 배정은 제작국장이 조연출협의회의 의견을 청취 후 업무를 배정한다. 직원의 신규 배정, 배정의 교체, 배정의 취소 등의 사안이 있을 땐 반드시 사전에 본인과 면담을 거쳐야 하며, 건강상·심리상의 이유로 배정된 인력이 번아웃 휴가를 요청할 경우 경영진은 즉각 해당 직원에 대해 업무에세 배제하고 보호 조치를 취해야 한다.
프로그램 제작 투입 시에는 직무 스트레스 관리 시스템을 도입한다. 회사는 직원들이 언제든지 회사에 알리지 않고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는 외부 기관을 지정해 운영하고, 직원 및 프로그램 제작 스텝의 고충 처리를 담당할 내부 고충처리인을 지정해 운영한다. 아울러, 매월 마지막주 금요일을 '고충상담의 날'로 지정하고, 경영진 및 프로그램 담당 CP, 제작리소스팀장은 심리상담이 필요한 직원 또는 스텝이 있는지 점검한다.
담당 프로그램의 CP 및 연출자는 방송 노동자의 쉴 권리 보장을 위해 촬영 스케줄을 세밀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를 위반해 직원 및 제작 스태프의 고충처리가 접수될 시 경영진은 즉각 개입해 이를 준수토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밖에도 가이드라인에는 휴게시간, 이동시간에 대한 규정이 포함된 '주52시간 제도' 촬영 시간 운영 방침, 식사·교통·숙박 등 스텝의 처우, 제작 인력 안전 관리 수칙, 아역배우 출연 관련 방침, 일터 내 괴롭힘 예방 수칙, 성희롱 예방 수칙 등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담겼다.
노조는 “주변으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았던 젊은 프로듀서의 죽음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방관되던 악습과 비합리적인 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며 “이번에 제정된 드라마 제작 가이드라인은 향후 스튜디오S 구성원, 나아가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연기자와 방송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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