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류이치 "난 보잘것없는 사람…내 음악은 먼 곳 향해"
대표 영화 '마지막 황제' 원래 배우로 참여…"당장 음악 만들라 요청받아"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내 인생을 돌아보니 나라는 인간은 혁명가도 아니고, 세계를 바꾼 것도 아니고 음악사에 기록될 만한 작품을 남긴 것도 아닌, 한마디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겠다."
지난달 28일 세상을 뜬 일본의 '음악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는 자서전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에서 이토록 박하게 자신을 평가했다.
사카모토는 "그런 내가 '나는 음악가올시다'라고 잘난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내게 주어진 환경 덕분이었다"며 음악적 성과를 부모, 스승, 친구 등 주변에 돌렸다.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는 그가 지난 2007∼2009년 잡지 '엔진'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해 묶은 책이다.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명성을 얻은 사카모토가 인생을 찬찬히 되돌아보며 고민과 사유를 풀어냈다. 이 책은 2010년 처음 출간된 책의 개정판이다.
사카모토는 유치원에 다니던 네다섯살 즈음 숙제로 '토끼의 노래'를 만들며 생애 처음 작곡에 발을 들였다. 그는 이 경험을 두고 "강렬한 체험이었다"며 "근질거리는 듯한 기쁨, 다른 누구의 것과도 다른 나만의 것을 얻었다는 감각. 그런 걸 느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사카모토는 10대 내내 음악 공부를 이어갔고, 서구권을 넘어 인도·오키나와·아프리카 등 민족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호소노 하루오미·다카하시 유키히로와 함께 한 3인조 밴드 YMO(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는 그에게 명성과 삶의 전환을 동시에 가져다줬다.
그는 선구적인 전자음악과 일렉트로 힙합에서 록 음악, 오페라를 비롯한 클래식까지 경계를 확장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음악가로 평가받았다.
사카모토는 '전장의 크리스마스'를 계기로 영화음악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마지막 황제'(1986)로 1987년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작곡상을 받았다.
'마지막 사랑'과 '리틀 붓다'로 골든글로브와 영국영화아카데미상을 받으며 영화음악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영화음악 대표작 '마지막 황제'에 얽힌 뒷얘기도 들려준다. 실은 영화음악 감독이 아닌 배우로 먼저 참여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는 제국주의자 아마카스 마사히코 역할을 맡아 당초 할복자살로 돼 있던 대본을 거부하고 권총자살로 바꾸자고 설득했다. 일본인이라면 무조건 할복을 떠올리는 고정 관념적 발상에 따른 연출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할복을 빼든지 나를 빼든지 하라"는 강경한 태도에 결국 작품 속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권총자살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사카모토는 "베이징에서 시작해 다롄, 창춘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촬영하던 때 감독이 불쑥 그 장면에 생음악을 넣고 싶다고 했다"며 "그러고는 나에게 지금 당장 대관식 음악을 만들라고 했다. 그때까지 배우로서 촬영에 참가했을 뿐, 음악을 만들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고 썼다.
'마지막 황제'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은 촬영 종료 후 반년이 지나 다시 사카모토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튼 당장 (영화의 음악을) 맡아 달라"고 했다. 사카모토는 그렇게 2주에 걸쳐 밤을 새워 가며 도쿄와 런던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마지막 황제'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사카모토는 생전 음악뿐 아니라 환경, 평화 문제 등 사회 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예술가로도 유명했다.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며 탈원전을 주장하는 사회 운동에 참여했고, 삼림 보전단체 '모어 트리즈'(more trees)와 일본 지진 피해 지역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를 설립하기도 했다.
사카모토는 그러나 이 같은 사회 참여 활동에 대해 "나로서는 되도록 범위를 넓히지 않고, 오히려 최대한 좁혀서 음악만 하면서 살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어쩌다 보니 다양한 일에 관여하고 다양한 체험을 하는 처지가 됐다"며 "뭐랄까, 모두 다 내친김에 했다고나 할까"라고 그답게 덤덤하게 풀어냈다.
이 자서전은 사카모토가 암 진단을 받기 이전에 집필됐기에 그의 투병과 해당 기간 음악 작업기는 담겨 있지 않다. 그러나 2009년 내놓은 솔로 음반 '아웃 오브 노이즈'(Out of Noise)와 관련해 적어 내려간 설명을 보면 음악을 바라보는 거장다운 시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사카모토는 "음(音) 자체의 분위기에도 꽃꽂이 같은 점이 있다"며 "만들어냈다기보다는 그곳에 존재한다는 느낌이다. 내가 연주한 피아노 소리, 여러 사람에게 연주를 부탁한 악기 소리, 북극권에서 녹음한 자연의 소리 등 다양한 소재를 꽃꽂이처럼 배치해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서술했다.
"내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인간 세계나 현재의 일과는 조금 동떨어진, 보다 먼 곳을 향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가만가만 늘어놓고 찬찬히 바라본다."
양윤옥 옮김. 298쪽.
ts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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