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행동나선 강제동원 피해자들, 일본 기업 재산 압류했다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강제동원 피해자 원고들이 법원으로부터 피고인 미쓰비시 중공업의 국내 재산 압류 결정을 받아냈다. 윤석열 정부가 일본 기업이 아닌 제3자 변제를 통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보유한 법적 권리를 소멸시키겠다는 구상을 발표했지만, 이들의 동의가 없는 한 정부 계획을 현실화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단체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5일 보도자료를 통해 "대전지방법원은 4월 3일 근로정신대 소송 원고 김재림(金在林) 할머니 등 원고 4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신청한 국내 특허권 4건에 대해 압류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압류된 대상은 원고 1명 당 미쓰비시 중공업 국내 특허권 각 1건 등 총 4건으로, 원고의 채권액은 1심 판결에서 선고된 배상액과 지연 이자 등을 합해 약 6억 8700만 원이다.
시민모임 측에 따르면 원고들은 지난 2014년 2월과 2015년 5월 광주지방법원에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해, 각각 1심과 2심에서 승소했다. (△광주지방법원 2014가합1463호 양영수 외 3명 △광주지방법원 2015가단513249호 이경자 외 1명)
그런데 피고인 미쓰비시 중공업이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했고 이에 따라 위 사건이 각각 2018년 12월, 2019년 1월 대법원에 계류된 상태다. 이후 현재까지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다.
시민모임은 "피해자 측은 1심 승소와 함께 배상액을 강제집행할 수 있는 가집행 권리까지 확보했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해 그동안 가집행을 미뤄왔었다"며 "그러나 대법원에 사건이 접수된 지 만 4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판결이 요원한 상황"이라며 압류 신청을 한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이들은 "최근 우리 정부가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하는 등 원고들의 소송 취지를 왜곡하는 정치적 야합을 서두르고 있다"며 "더 이상 권리행사를 미룰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강제집행에 나서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번 법원의 결정에 따라 피고 기업이자 채무자인 미쓰비시 중공업은 압류 대상이 된 특허권에 대해 매매, 양도, 기타 일체의 처분이 금지된다.
가집행(假執行)은 상급심에서 가집행선고 또는 판결이 취소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집행 효력을 발생시키는 제도로, 이번처럼 대법원 최종 판결이 4-5년 씩 늦어지면서 승소한 사람이 불이익을 보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마련됐다.
시민모임은 "이번 대전지방법원의 압류 결정에 따라 현재 미쓰비시중공업이 소유한 국내 자산(특허권‧상표권) 중 강제집행 절차를 밟고 있는 것은 상표권 2건, 특허권 10건 등 총 12건으로 늘었다"고 전했다.
윤석열 정부, 강제동원 피해자와 법적 공방 벌이나
윤석열 정부는 지난 3월 6일 입장문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대법원으로부터 받은 확정 판결에 따라 받아야 할 판결금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 재단'이 민간의 자금을 모집해 대신 판결을 이행하는 방안을 내놨다. 피고인 일본 기업의 채무 이행을 면제해준 것이다.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 방문 전에 이뤄진 3월 15일 보도된 일본 <요미우리> 신문 인터뷰에서 정부의 해법안에 대해 "관계 국민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해 나중에 구상권 행사로 이어지지 않을 방법을 검토했고 이번에 결론을 내렸다"며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하기도 했다.
정부는 '제3자 변제'를 통해 대법원으로부터 받은 원고들의 권리를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입장문 발표 당일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당국자는 "법리적으로 (원고가) 끝까지 (제3자) 변제를 수령하지 않는 경우 공탁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다"며 국내 유수 전문가들의 검토 및 자문을 거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이같은 구상은 법적으로 논란이 됐다. 정부 입장문 발표 당일 원고측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해마루 김세은 변호사는 "민법 469조 2항에 따르면 이해관계 없는 제3자는 채무자에 반하여 변제하지 못한다고 돼있는데 재단은 이해관계 없는 제3자"라며 "당사자 의사에 반하는 변제방식과 공탁은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한국 정부가 당사자 의사에 반해 공탁을 검토한다는 것은 새로운 가해행위"라며 "피해자가 (대법원으로부터 판결받은) 위자료의 의미는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때 그것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돈으로나마 위로한다는 의미다. 이를 누구나 돈을 줘도 괜찮은 채권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소송대리인 임재성 변호사는 실제 정부가 공탁을 시도할 경우 법적 공방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 변호사는 "만약 재단이 일방적으로 피해자 의사에 반해 공탁을 하고 집행 사건의 공탁서를 제출할 경우 집행 과정에서 무효를 확인하는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원고 측이 피고인 일본 기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채권은 어디 가지 않는 권리다. 10년에 한 번씩 소멸시효 극복 위한 간이한 소송만 하면 계속 이어진다. 단단하고 오래갈 수 있는 권리"라며 "외교부 측과 만날 때도 (대법원의) 확정 판결 받은 것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다. 피고 기업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정 판결에 대한 피해자들 권리는 여전히 가지고 행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피해자들은 대법원으로부터 받은 확정 판결을 이행하기 위한 법적 절차에 돌입했다. 우선 재단이 판결금을 변제한다고 해도 이를 수령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
3월 13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을 맡고 있는 소송 대리인 측은 원고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가 지난 2018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확정된 채권과 관련 "제3자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의뢰인 양금덕·김성주의 의사를 본 내용증명으로 명확히 밝히니, 수신인은 의뢰인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증명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날 재단 측에 내용증명을 전달한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해마루 임재성 변호사는 변제 거부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게 된 배경에 대해 "(민법 조항의 해석을 담은) 민법주에는 (채권자가) 제3자 변제를 거부할 경우 그 의사 표시를 변제 전까지 해야한다고 명시돼있다. 그래서 저희가 이 의사 표시를 늦출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3월 16일 2018년 대법원 강제동원 확정판결의 원고들은 미쓰비시 중공업의 채권에 대한 추심금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해마루 장완익·임재성·김세은 변호사는 "2018년 11월 확정된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의 원고 중 일부(생존자 1인, 돌아가신 피해자 1인의 유족들, 이하 '원고들')가 15일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자산인 채권에 대해 (이하 '이 사건 자산')에 대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추심금 소송을 제기했음을 밝힌다"고 전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부가 제3자 변제를 통해 원고의 권리를 없애려면 법적 공방이 불가피하고, 이 공방을 끝내려면 수년이 걸릴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실제 정부가 피해자들과 법적 공방에 돌입한다면, 국민의 생명과 안전 및 권리를 보호해야 할 정부가 법적으로 이미 보유하고 있는 국민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 다툼을 벌이게 되는 셈이다.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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