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트럼프 출석 법원 앞 욕설과 증오…두 쪽으로 갈라진 미국
“이 XX야!”
“어떻게 여성한테 그런 욕을 해!”
미국 역사상 기소된 첫 전직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 쓴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맨해튼 형사법원에 출석한 4일(현지시각). 법원 앞 공원은 각각 200여명씩 모인 반트럼프-친트럼프 진영의 세 과시와 상호 비난의 장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한 남자가 거친 욕을 내뱉자 반대 집회 참가자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트럼프 반대 시민들이 “트럼프를 구속하라”고 써진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자, 찬성 시민들은 “바이든을 구속하라”고 쓴팻말을 흔들며 욕설을 내뱉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라는 ‘독특한 정치인’에 대한 찬반으로 둘로 쪼개진 미국 사회의 현 주소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뉴욕 경찰은 충돌을 막으려고 공원을 반으로 갈라 철제 펜스 2개를 치고 중간에 경찰관들을 배치했다. 폭이 2m가량인 중간 지대를 사이에 두고 양쪽은 얼굴이 벌개지도록 욕과 험한 말을 주고받았다. 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이곳에 왔을 법한 같은 미국인들이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판과 2024년 11월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미국 정치의 극단화가 더 심각해질 수 있음을 예고하는 장면 같기도 했다.
검찰은 이날 법정과 기자회견을 통해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6년 11월 대선 직전 포르노 배우에게 성관계 입막음용 돈을 주고 장부 등을 조작한 것은 “심각한 범죄 행위”라고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예상대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극명한 인식 차이는 법원 밖 집회 참석자들 입을 통해 그대로 확인됐다. 반트럼프 진영은 2021년 1월6일 의사당 난동 사태 선동 등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여러 범죄를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친트럼프 쪽은 이 모든 것이 유력 대선 후보에 대한 ‘정치 탄압’이라며 맞섰다. 서로에 대해 쏟아내는 증오의 감정은 이미 정상적인 ‘정치적 견해 차이’ 수준을 크게 넘어선 듯 보였다. 사람들은 “트럼프 엿 먹어라”, “바이든 엿 먹어라” 등 혐오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손팻말을 흔들어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인 마저리 테일러 그린 공화당 하원의원이 오전 한때 지지 연설에 나섰으나 큰 야유와 북소리에 묻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초선 의원으로 가짜 경력 시비에 시달리는 같은 당 조지 산토스 하원의원도 모습을 보였다.
휴가 중 직장 동료와 함께 집회에 왔다는 맥스 웨프린은 “트럼프는 의사당 난동 사주 등 다른 범죄도 많이 저질렀으니 반드시 투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적 탄압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소시오패스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노예제와 홀로코스트도 합리화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답했다.
마이클 코리든은 트럼프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구호인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글자를 새긴 빨간 모자를 쓰고 펜스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는 조 바이든 행정부는 “공산주의, 전체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는 질문에 “난 그건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왜 그 사람만 처벌하려 드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딥 스테이트’(국가 조직에서 비밀스럽게 자신들 이익을 추구하는 음모 집단)의 일부인 법무부가 바이든 대통령의 아들 헌터에 대한 수사에는 손 놓고 있다며, 트럼프 전 대통령을 두 번 탄핵한 민주당 쪽이 사법권을 불공정하게 휘두른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법원 출석을 앞두고 하루 밤을 묵은 트럼프타워 앞에선 이른 아침부터 소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쇠창살에 갇힌 트럼프 전 대통령을 묘사한 그림판을 든 켄 키드는 “트럼프는 범죄자이고 증오를 선동해왔다”며 “뉴욕의 내 동료 시민들인 대배심원단이 내린 기소 결정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또 당선되면 어쩌냐’고 묻자 “미국인들은 그보다는 현명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트럼프타워 건너편에서 ‘트럼프’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있던 수전 섬블은 “그는 가족과 명예를 지키려고 돈을 줬다. 많은 사람들이 돈 거래를 한다”며 그에겐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심각한 분열을 걱정하는 듯한 이가 “서로 혐오를 멈추자”고 쓴 손팻말을 들고 양쪽을 오갔으나 그의 호소는 친트럼프-반트럼프의 깃발과 함성에 묻혀버렸다. 귀청을 찌르는 커다란 욕설과 저주의 함성 속에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길을 잃은 듯 보였다.
뉴욕/글·사진 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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