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임진왜란 영규대사·800 의승 희생도 기려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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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스님들이 "임진왜란 당시 승병대장인 영규대사와 800 의승의 희생과 역할이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며, 문화재청 차원에서 제대로 기려줄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원들은 "지난 20여 년 동안 영규대사와 인연이 있는 금산 보석사와 옥천 가산사, 공주 마곡사와 갑사, 장성 백양사, 중앙승가대 및 관련 단체가 국회에서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이를 바로 잡아 줄 것을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제기하였으나, 아직까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조헌 등 유생들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1500명이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지만, 800명의 스님들은 시신조차도 거두지도 않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4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규대사와 800 의승에 대한 국가차원의 기념비도 위령제도 없고, 기념식도, 제향도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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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스님들이 “임진왜란 당시 승병대장인 영규대사와 800 의승의 희생과 역할이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며, 문화재청 차원에서 제대로 기려줄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일동은 5일 ‘승병장 영규대사와 800 의승 명예 회복 촉구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이 발표문에서 “불교 억압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도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승려들은 의연하게 승병의 길을 택해 민족과 국토를 지켜왔고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분이 승병장 영규대사”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규대사는 처음으로 승병을 일으켜 800 승병을 이끌고 최초 육상전투의 승리인 청주성 탈환과 금산 연공평전투에서 휘하 의승 800여 명과 함께 왜군의 호남진입을 막아 곡창지대를 보호하고, 적의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큰 공을 세웠지만 이러한 의승의 역할과 희생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계종 차원에서 들고나온 영규대사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고제로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했고 선장으로 무예를 익혀 임진왜란에 터지자 나라를 위해 나섰다. 선조실록 (1592년 9월 11·12일자)과 승정원일기, 쇄미록, 유팽로의 월파집 등에 영규대사와 의승들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원들은 “지난 20여 년 동안 영규대사와 인연이 있는 금산 보석사와 옥천 가산사, 공주 마곡사와 갑사, 장성 백양사, 중앙승가대 및 관련 단체가 국회에서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이를 바로 잡아 줄 것을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제기하였으나, 아직까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조헌 등 유생들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1500명이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지만, 800명의 스님들은 시신조차도 거두지도 않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4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규대사와 800 의승에 대한 국가차원의 기념비도 위령제도 없고, 기념식도, 제향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금산 칠백의총에 조선 후기까지는 의승을 위한 제향 공간이 별도로 있었다”며 “ 문화재청이 2021 년 9 월 23 일 발간한 ‘칠백의사 그 충절의 기록들’ 에도 조헌·고경명 등 21위의 위패를 안치한 종용사 서쪽에 영규대사와 의승을 위한 사당이 있었고, 그 이름은 승장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내부에는 영규대사와 승장사졸 위패가 좌우로 모셔져 있었다는 것은 금산군읍지, 이재난고, 여지도서· 각부청의서존안 등에도 나온다”고 밝혔다.
사료에 따르면 조선 조정은 봄과 가을 마지막 정일 (丁日) 에 종용사에서 영규대사 등 의승들에게 제향을 올렸는데, 이때 제물은 관아에서 마련했고 , 승장 영규와 의승에게 고기 제물 대신 두부를 올려 예를 갖췄다. 의승을 위한 제향은 대한제국 광무 2년(1898) 7월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40년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조선총독부 식민지 정책 강화로 칠백의총이 훼손됐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1·2차 성역화사업으로 1970~1976년 칠백의총을 복원·정비했지만, 이때도 조헌 선생 선양이 강화된 것과 달리 영규대사와 의승의 공적은 아예 누락되어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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