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트럼프가 갈라놓은 ‘두 개의 미국’…맨해튼 법원 앞은 대치 중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기소인부절차가 진행된 4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 앞 커넥트폰드 공원은 사실상 두 공간으로 쪼개져 있었다. 경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기준으로 한 쪽은 트럼프 지지자, 다른 쪽은 트럼프 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점유했기 때문이다.
이따금 지지자 구역에 트럼프에 반대하는 시민이 들어갔다가 항의를 받고 끌려나오거나 혹은 반대의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트럼프 이후 갈라진 ‘두 개의 미국’이 그 곳에 있었다.
기자가 현장을 찾은 이날 오전 8시에도 이미 제법 많은 수의 시민들이 모인 상태였다. 뉴욕시 당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확대 배치한 경찰 병력도 공원 출입구를 지키거나 순찰을 돌고 있었다. 미국과 전 세계에서 온 취재진은 물론 개인 유투버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뉴저지주 출신 60대 남성 토니는 교통통제를 우려해 새벽 6시30분에 왔다면서 “민주당도, 트럼프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파이지만 역사의 순간을 기록해 친구들에게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 숫자만 놓고 보면 트럼프 지지층이 월등히 많았다. 조직화된 군중은 아니었지만,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의 트럼프 대선 구호) 로고 등이 새겨진 빨간색 모자나 티셔츠를 착용하고 있어 멀리서도 도드라졌다. 2020년 대선 결과를 부정하거나 코로나19 조작설·임신중단권 철폐·언론 예산 삭감 등 극우 성향 의제를 지지하는 이들도 많았다.
‘트럼프 2020’ 깃발을 흔들고 있던 50대 여성 파멜라는 “모든 것이 미쳐돌아가고 있다. 트럼프는 어떤 법률도 위반하지 않았다”며 “2024년 대선이 공정하게만 진행된다면 트럼프가 당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주 주도 얼바니에서 세 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왔다는 40대 여성 모린은 상냥한 목소리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라며 “트럼프 때는 모든 것이 평화롭고 범죄도, 왜곡된 성교육도 없었다”고 말했다.
극우 성향 마조리 테일러 그린 공화당 하원의원이 집회 참석을 예고한 것도 지지층을 불러낸 요인으로 작용했다. 오전 10시35분쯤 그가 공원 안에 들어오자 순식간에 구름관중이 모여 몸싸움을 벌이면서 우발적 충돌 우려 상황 직전까지 갔다.
허위 이력과 경력, 가족사항 등으로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조지 산토스 공화당 하원의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취재진과 카메라를 든 지지자들이 에워싸자 “나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밝히기 위해 이 곳에 왔을 뿐”이라며 날카롭게 반응하기도 했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민들에게 이 날은 “기소 결정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 ‘그를 감옥에 가둬라’ 등이 적힌 현수막이 등장했고, 각양각색의 시위가 벌어졌다. ‘혁명은 섹시하다’는 이름의 극단에 속해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한 40대 여성 마르니는 경찰 제복 차림을 하고 수갑을 찬 트럼프 모형 인형과 돈다발을 들었다. 마르니는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 때부터 해 온 방식”이라며 “일하느라 이 곳에 오지 못했지만 트럼프가 수감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뉴요커들이 많다는 점을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인근 페이스대에 재학중인 조던과 아나니슬라는 “우리는 법률과 앨빈 브래그 맨해튼 지검장을 신뢰한다”며 “트럼프가 책임져야 할 일이 매우 많고, 이번 기소가 첫 단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법원에 출석하기 위해 주먹을 들어보이며 트럼프타워를 나선 1시 이후부터 법원 앞 대로변과 공원 안은 더욱 북적댔다. 특히 급격히 불어난 트럼프 지지자들을 보고 있자니 언론 보도 소재로 종종 등장했던 트럼프 지지층의 외연 확장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백인들 못지않게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계가 ‘마가’에 몸담고 있었다. 당내 무시못할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마가 공화당원들은 생각 외로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왔다는 50대 남성 량은 “미국이 나아가는 방향을 우려한다면 트럼프를 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두 진영은 때때로 설전을 벌였지만 다행히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양쪽 주장을 들으면 들을수록 서로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특히 뉴욕 한복판에 수천명에 달하는 선거 부정론자들이 모였다는 사실 자체도 미국 민주주의 위기의 현주소를 보여줬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형사재판에 회부된 전직 대통령 트럼프는 또 다시 미국을 갈라놓고 있었다.
뉴욕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공군 대령, ‘딸뻘’ 소위 강간미수···“유혹당했다” 2차 가해
- 윤 대통령 공천 개입 의혹, 처벌 가능한가?
- [스경X이슈] ‘흑백요리사’ 출연진, 연이은 사생활 폭로…빚투→여성편력까지
- 윤 “김영선 해줘라”…다른 통화선 명태균 “지 마누라가 ‘오빠, 대통령 자격 있어?’ 그러는
- [단독]“가장 경쟁력 있었다”는 김영선···공관위 관계자 “이런 사람들 의원 되나 생각”
- [단독] ‘응급실 뺑뺑이’ 당한 유족, 정부엔 ‘전화 뺑뺑이’ 당했다
- 윤 대통령 “김영선이 좀 해줘라 그랬다” 공천개입 정황 육성…노무현 땐 탄핵소추
- [단독] 윤 대통령 “공관위서 들고 와” 멘트에 윤상현 “나는 들고 간 적 없다” 부인
- [단독]새마을지도자 자녀 100명 ‘소개팅’에 수천만원 예산 편성한 구미시[지자체는 중매 중]
- “선수들 생각, 다르지 않았다”···안세영 손 100% 들어준 문체부, 협회엔 김택규 회장 해임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