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기의 콘텐츠 이야기] K콘텐츠에서 찾는 가치와 매력
콘텐츠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먹거리는 이제 콘텐츠라고들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뤄진 성과를 보면 그럴 만도 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1월 4일 발표한 ‘2021년 기준 콘텐츠산업조사(2022년 실시)’ 결과에 따르면 2021년 콘텐츠산업 수출액은 124억5000만달러를 기록했고 매출액도 전년 대비 7.1%나 증가했다. 한국은행의 당시 연평균 환율(1144원)을 적용하면 무려 14조3000억원이다.
전반적으로 경제 상황이 어려운 가운데 콘텐츠 산업은 급성장하고 있고, 콘텐츠 산업 수출은 화장품, 식품 등 다른 산업 분야의 동반성장 효과까지 지니고 있다.
그러다 보니 K-콘텐츠는 수출 구원투수이자 한국경제의 게임 체인저가 되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정부는 2027년에는 세계 4대 콘텐츠 강국 실현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콘고지신(Con故知新)’이라는 용어도 생겼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3 콘텐츠 산업 전망 키워드 10가지’ 중 하나인데, 과거의 콘텐츠를 활용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전략이다. 역사는 콘텐츠의 가장 중요한 소재다. 하지만 우리만 우리 역사를 베이스로 해 콘텐츠를 만드는 건 아니다. 한인 이민 가족 4대의 삶과 꿈을 그려낸 대하드라마인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는 한국 역사를 주된 이야기로 하는 미국 드라마로 세계적인 반응이 나왔다.
▶콘텐츠란 무엇인가=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이야기 산업은 이제 콘텐츠 산업이라는 말로 대체될 정도다. 또 콘텐츠 산업은 ‘21세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며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지식재산권(IP) 산업의 총아다. 이렇게 콘텐츠가 중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지만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콘텐츠가 되는지를 배워본 기회는 별로 없다.
정부는 매년 콘텐츠산업 분류에 근거해 11개 산업(출판, 만화, 음악,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방송, 광고, 캐릭터, 지식정보, 콘텐츠솔루션)에 대한 통계정보를 제공하는 ‘콘텐츠산업조사’를 실시하지만, 이것만으로 콘텐츠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콘텐츠(contents)는 원래 ‘목차’라는 뜻을 지닌 영어다. ‘콘텐츠 산업’이라고 할 때 콘텐츠는 ‘목차’는 아니다. 콘텐츠의 의미를 비교적 빨리 간파해 사명에도 표출한 기업이 CJ ENM이다. ENM은 콘텐츠의 뜻을 잘 풀어쓴 사명이다. 원래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 미디어(Media)’의 축약어지만, 뮤직, 무비, 머천다이징 등 다양한 사업군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콘텐츠 산업의 핵심은 이야기를 장르화해 미디어에 담고, 또 이야기를 적절히 유통시켜 상품화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미디어에 담기 위해서는, 또 이야기를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야기가 새롭고 흥미로우면서 매력적이어야 하고, 미디어에 담긴 이야기와 철학, 감성이 마음속에 훅 들어와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경쟁력 있는 콘텐츠라 할 수 있고, ‘콘텐츠적(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CJ ENM은 ‘무궁무진한 이야기’라는 뜻의 슬로건 ‘Untold Originals(언톨드 오리지널스)’라고 하고, 자사 IP 철학인 ‘공감과 연대를 통한 즐거움(Happiness and Togetherness)’으로 표현한다.
▶어떻게 하면 콘텐츠가 되는 것인가=콘텐츠로서의 힘이 강해지면, 스토리 등 내용물과 그 속에서 제기한 이슈에 대한 몰입도가 강하게 생긴다. 그렇게 되면 그 배경지와 소품 등은 저절로 홍보된다. 이것이 콘텐츠 효과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여행 예능만 봐도 그 점은 잘 드러난다. 하정우, 주지훈, 최민호, 여진구가 뭉쳐 더 많은 청춘을 여행 보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리고생 로드트립인 티빙의 여행 예능 ‘두발로 티켓팅’은 좋은 기획이긴 하지만 그리 재미있는 예능은 아니다. 배경으로 나오는 뉴질랜드 남섬 퀸스타운의 주변 호수 등의 자연에는 여행 가고 싶지만, 흥미가 덜해 프로그램의 몰입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여행 예능이 재미있어 먼저 그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면, 그 속에 있는 뉴질랜드 남섬은 덤으로 여행 가고 싶게 된다. 콘텐츠로서의 성공은 그것으로 판가름 난다. 하지만 ‘두발로 티켓팅’은 오히려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김태호 PD가 연출하는 ENA ‘주사위 한 번에 대륙이동-지구마불 세계여행’은 이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여행예능이다. 여행 크리에이터인 빠니보틀, 원지, 곽튜브가 주사위를 던져 무작정 출발한 즉흥 여행기다. 이들이 어디로 여행을 가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싱가포르, 방글라데시, 라오스, 탄자니아, 마다가스카르, 핀란드, 인도네시아의 무인도 등 여행지에서 마주한 예측불허 상황과 뒷이야기, 여행 꿀팁을 대방출해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결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돌발변수들에 대응해 나가는 이들 세 명의 대처법 역시 콘텐츠로 만들어질만 했다. 때로는 뻔뻔함도 필요했다. 무계획, 급이동, 노예약 여행, 한마디로 우여곡절 여행의 진수를 잘 보여주었다. 라오스 현지 택시기사와 흥정하며 반값 이상으로 깎는 ‘네고(가격흥정) 타노스’의 면모를 보인 곽튜브는 특히 흥미로웠다. 한마디로 ‘지구마불 세계여행’은 콘텐츠화에 성공했다.
극사실주의 여행예능 MBC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태계일주)’도 고전하는 지상파 여행 예능에서는 그나마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남미를 여행하면서 서울에서 강릉 가는 정도의 짐만 챙기고 오는 기안84가 현지의 낯선 환경과 문화를 체험하는 장면과, 의외로 입이 짧은 이시언과 악어 고기도 먹는 기안84의 대조적 조합이 흥미를 주면서 콘텐츠적으로 성공했다.
▶콘텐츠는 어떤 영향을 이끌어내는가=넷플릭스 예능 ‘피지컬:100’은 결승전 논란이 생기긴 했지만, 콘텐츠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서바이벌 게임 예능이다.
‘피지컬:100’은 그 흔한 근육 자랑 예능이 아니다. 헬스·웨이트 트레이닝 등을 통해 몸을 만드는 예능은 철지났다. ‘피지컬:100’은 보디빌더뿐 아니라 다양한 직업군이 참가해 몸만으로 대결하는데, 예상한 대로만 승부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관전포인트였다. 강인함과 순발력, 지구력 등을 두루 테스트하기 때문이다.
몸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과 몸의 외관보다 전략과 정신력을 잘 발휘해 승리하는 명승부가 더 많이 나왔다는 사실은 글로벌화에 유리한 조건이다. ‘피지컬:100’은 뜨거운 글로벌 반응이 나오면서 대륙별 ‘피지컬:100’을 만들자는 안까지 나왔다. 결과적으로 콘텐츠로 크게 성공한 셈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는 기독교복음선교회(JMS) 등 사이비 종교의 실태를 고발하면서도 매우 콘텐츠적인 시사 다큐로 인정받았다.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다큐를 보고 많은 신도가 탈퇴하고 있다. JMS 2인자 정조은이 정명석의 범죄 사실을 인정해버리는 일이 벌어진 것도 이 다큐가 초래한 변화다. 정명석의 여신도 성폭행 혐의 재판 변호를 맡아온 법무법인 광장의 변호인들이 전원 사임하기도 했다. 이처럼 잘 만든 콘텐츠 하나는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히트한 ‘파친코’도 콘텐츠적으로 매우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인한 쌀 수탈과 강제 징용 문제,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등을 다루면서 모든 일본 순사를 악마화하지 않는 등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 논리가 아닌 좀 더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방식은 두 나라의 거리를 좁혀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3자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큰 화제가 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도 학원폭력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주의 환기 효과와 함께 몇몇 나라에서는 문동은(송혜교)의 학폭 피해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벌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더 글로리’는 4억1305만시간 누적 시청을 기록하며 넷플릭스 TV(비영어) 부문 역대 시청 시간 6위로 올라섰다. 미국 비평사이트 IMDb에는 무려 1만1000여명의 시청자가 ‘더 글로리’ 평가에 참여하며 뜨겁게 반응하고 있다. 미국의 주마다 학폭에 대처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몇몇 주에서는 가해 학생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부모 역시 처벌하고 있음을 알려왔다. 이처럼 콘텐츠화가 잘된 작품들은 대체로 좋은 영향을 미친다.
▶K-콘텐츠에서 생성되는 가치와 매력은=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콘텐츠들이 아시아를 넘어 미주와 유럽까지 확산되고 있다. 그 이전에도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등 K-팝 아티스트들이 월드투어를 하면서 글로벌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서양인들에게 큰 반응을 일으킨 것은 K-드라마와 K-무비가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을 단순히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유통망을 깔아놔도 소비자가 흥미를 느낄만한 콘텐츠가 없으면 이용하지 않는다.
K-콘텐츠에는 한국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생긴 양극화와 빈부격차, 남녀갈등, 계급갈등 등을 담고 있는 드라마나 영화들이 많다. 좁은 땅덩어리에 많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생긴 과도한 경쟁심과 역동성은 콘텐츠 제작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자본주의의 ‘투머치(too much)’한 현상과 그에 대한 갑론을박이 SNS상에서 결합되면, 논의거리가 풍부해진다.
이런 내용을 담는 K-콘텐츠에는 자본주의로 인한 경쟁사회의 과도함과 잔인함을 먼저 체험한 서양의 국가일수록 더욱더 공감력과 몰입력이 생기게 된다. ‘오징어게임’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의 저널리스트들이 유독 많은 리뷰를 내놨었다. 조직사회의 괴롭힘(갈굼) 문화의 극단을 보여준 ‘D. P.’와 경쟁 사회의 위험성과 피곤함을 각각 경고한 ‘오징어 게임’과 ‘갯마을 차차차’가 해외, 특히 선진국에서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모든 콘텐츠에 가치와 의미를 담을 필요는 없지만, 현재의 글로벌 환경에서 K-콘텐츠의 가치와 의미, 철학 생성하기가 콘텐츠 제작과정에서 매우 중요해졌음을 강조하고 싶다. 이 일에 한국 콘텐츠 제작자들이 더욱 주목해야 한다.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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