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친 길 위에서 생명을 포착하다[김정수의 시톡](20)

2023. 4. 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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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휼 시인의 사진 시집 <말에서 멀어지는 순간>

봄햇살 말간 산책길이었습니다. 늘 다니던 골목길에 노란 씀바귀꽃 한 무더기 피어 있었지요. 시멘트 틈새를 비집고 만개한 꽃이 신기해 가던 길 멈추고 휴대전화로 찍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중년 여성이 “어머나! 정말 예뻐요” 하더니만, “이거 제가 뽑아다가 키우면 안 될까요” 했습니다. “저 꽃이 있을 자리는 여기가 맞다”며 만류했지만, 내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뽑았습니다. 이튿날 다른 골목 화단에서 마주친 그 꽃은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지요.

김휼 시인(왼쪽)과 표지 / 걷는사람



중심에서 발현되는 순간과 미혹의 시

김휼 시인(1962~ )의 사진 시집 <말에서 멀어지는 순간>을 몇 장 넘기면 제가 본 장면과 비슷한 사진이 나옵니다. 시멘트로 포장된 골목길, 길과 벽 그 틈새에 맨드라미가 붉은 꽃을 피웠습니다. 포장한 지 오래됐는지 길과 벽이 시커멓습니다. 맨드라미 키만큼 시커먼 벽은 위로 갈수록 점점 밝아지고, 더 위쪽은 흰색 페인트를 칠했습니다. 맨드라미 오른쪽은 새로 시멘트를 발라 전체적으로 캔버스 느낌이 났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눈을 사로잡고, 발길을 멈추게 했겠지요. 사진과 어우러진 짧은 시 제목은 ‘소명’입니다. 꽃에 초점을 맞추던 시인은 “나를 이곳에 두기로 했어요”라고 합니다. 꽃에 자신을 투영하지요. 도저히 생명이 살 것 같지 않은 자리에서 꽃과 시인은 하나가 됩니다. “산다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꽃 한 송이 피우”거나 “버려진 땅에 꽃을 심는 일”이지요. 시인은 “당신은 가던 길을 (그냥) 가면” 된다고 합니다. 함부로 생명을 쥐고 흔들거나 개입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고 사물이고 다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면 되겠지요.

시인은 “한 걸음 물러서면 보이는 길”(이하 ‘시인의 말’)에서 풍경을 좇다가 그만 “길을 놓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놓친 길에서 보는 또 다른 길도 “그리 나쁘지 않”아 피사체를 오래 들여다보면 ‘신비’나 ‘기도’ 아닌 것이 없다고 합니다. 앞으로 가던 길이 아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보이는 “적요 무성한 이 길”은 시인이나 종교인의 길일 것입니다. 시인은 광주 송정제일교회 부목사이기도 하니까요. 하여 시 ‘새벽 기도’에서 불 꺼진 교회에서 홀로 새벽기도를 드리는 사람을 배경으로 한 사진에 “빛을 안고 가는 하루는 축복이라서// 무거운 미명을 밀고 나와/ 은혜 안에 얼굴을 묻는다”고 했을 것입니다. 또 작은 열매가 떨어진 자리에서 “당신 몸에 박힌 가시들”(‘물방울 테라피’)을 보거나 갈라진 축대에서 찾은 십자가에서 “믿음으로 내딛는 걸음”(‘십자가의 길’)을, 활짝 피기 전 꽃송이에서 “서로의 목숨을 둘러 안고/ 기도로 밤을 새운 가슴”(‘꽃의 기도’)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시인이 풍경에서 찾은 것은 “내 중심에서 발현되는 순간”(‘산고’)에 쓰인 “미혹의 시”(‘죽화경 넝쿨장미’)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틈은 생명의 출구

매혹적인 풍경의 길은 여는 시 ‘가늠’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우연히 자벌레 한 마리가 몸을 구부리며 나무에 오르는 장면을 포착합니다. 작은 자벌레에겐 움푹 파인 나무껍질이 깊은 골짜기나 암벽 같을 것입니다. 시인이 주목한 건 ‘높이’가 아닌 ‘깊이’입니다. 자벌레가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결국 ‘그 나무’입니다. 인간이 신의 영역까지 오를 수는 없으니까요.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다다르려면 “침묵의 구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는 먼 곳에 이르기 위한 휴지기 같은 것이지요. 시인은 ‘문장’이나 ‘사람’도 “마찬가지”라 합니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은 거기의 당신과/ 여기의 나 사이/ 갑골의 시간”과 침묵의 거리를 가늠합니다. 그 거리와 시간은 ‘묵상’쯤 될 것입니다.

시인의 눈은 수시로 생명에 머뭅니다. 어둠을 배경으로 “목청 돋워 홰”(‘닭의장풀’)를 치는 듯한 닭의장풀, 서로 어우러진 하늘 높이 치솟은 대나무와 소나무(‘맹목’), “공중을 딛고 사는”(‘허공족’) 호랑거미, 나무울타리에 무성한 담쟁이덩굴(‘빈집’) 등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람도 빠지지 않습니다. “생명 하나 얻으려”(‘생명의 부양자’) 넓은 밭에서 씨앗을 심는 사람들, 비 내리는 유리창을 배경으로 차 한잔하는 노부부(‘분홍의 시간’), 한옥 툇마루에 앉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가족(‘엄마의 마음’), “육백 년을 거느린 느티나무 아래”(‘쉼’)에서 쉬는 노인들 말입니다. 이뿐 아니라 삼나무 우뚝한 길을 걷거나 산림욕을 하고, 안개 자욱한 길을 걷는 중년 부부를 마주합니다. 시인은 “이들의 색다른 걸음”(이하 ‘걷는 사람들’)에서 “푸른 꿈”과 경전과 “아름다운 밀도”(‘아름다운 동행’)를 봅니다.

<말에서 멀어지는 순간>에는 모두 67편의 시와 사진이 수록돼 있습니다. 봄을 시작으로 여름, 가을, 겨울에서 다시 봄으로 돌아오는 순환의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생성과 소멸의 순환이 담긴 풍경을 통해 생의 숭고함과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김휼 시인이 담아낸 사진 속 풍경은 길을 걷다 한 번쯤 마주친 일상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이를 놓치지 않고 순간을 포착해 시로 승화시켰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는 ‘말’에서 멀어졌다가, 카메라를 내려놓는 순간 다시 ‘말’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세상 모든 틈은 생명의 출구”(이하 ‘나를 키운 너의 틈’)라면서 “하늘이 무너”질 만큼 힘들었을 때, “나를 키운 건” 틈이었다고 합니다. “안으로 욱여넣은 파란의 세월”(‘파랑 친 세월’)을 건너온 시인은 틈, 그 “마음 깊은 곳의 어둠”(‘목련 촛불’)을 거둬주기 위해 오늘도 길을 나설 것입니다.

신을 벗다

걷는사람



눈부신 찰나를 가지고 있는 것들은
말에서 멀다
그러는 까닭에
나는 세상 모든 꽃을 내려놓고
신을 벗는다

산고

걷는사람



온몸의 솜털이 일어서는 일이죠
생살이 벌어지고
비명 따라 온몸의 관절이 훼절되는
더는 숨겨 가질 수 없는 당신의 빛이
내 중심에서 발현되는 순간입니다

◆시인의 말

▲봄만 남기고 다 봄
노미영 지음·달아실·1만원



동어반복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말(言)들은 여전히 견고한 담장 안에 갇혀 있었다.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육호수 지음·문학동네·1만2000원



언젠가 거듭 작별하는 꿈에서 너는 손 위에 검은 돌멩이를 쥐여주며 말했지. “새를 잘 부탁해. 죽었지만.”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
이동우 지음·창비·1만1000원



바람이 거셌다.
무너질 때
뿌옇게 날리던 게 뼛가루였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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