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안개’ 원로가수 현미 별세[플랫]

플랫팀 기자 2023. 4. 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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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현미씨(본명 김명선)가 4일 오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

경찰에 따르면 현미씨가 서울 용산구 자택에 쓰러져 있는 것을 이날 오전 9시37분쯤 팬클럽 회장 김모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현미씨는 인근 병원에 옮겨졌으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7년 때 미8군 무대를 통해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엔 무용수로 무대에 오르던 그는 어느 날 다른 가수의 대타로 노래를 부르며 가수가 됐다.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본 작곡가이자 색소폰 연주자인 고 이봉조씨와 음악적·인간적 파트너로 유명했다.

가수 현미

1962년 발표한 ‘밤안개’가 고인의 대표곡이다. 이봉조씨가 냇 킹 콜의 곡을 번안했다. 이 곡으로 큰 사랑을 받은 고인은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무작정 좋았어요’ ‘몽땅 내 사랑’ 등 히트곡을 잇달아 내 가요계 디바로 자리 잡았다.

올 초 아리랑TV에서 방영된 <더 K레전드: 가수 현미의 쉬즈 스틸 싱잉>에서 김학선 음악평론가는 “정말 풍부한 성량으로 노래를 하는 그런 가수를 디바라고 이야기하는데, 현미씨는 한국 대중 음악계에서 가장 최초로 그런 역할에 부합하는 아티스트였다”고 평가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고귀하고 소중하고 뜻깊었던 1960년대 문화의 산증인이 아직도 우리 옆에 있다는 것, 이것이 하나의 긍지고 자부심”이라고 했다.

고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한국 현대사와 호흡하며 노래로 위로를 전했다. 그 자신이 이산가족이기도 했다. 그는 1951년 1·4후퇴 때 동생들과 헤어져 생사도 모르고 지내다 1998년 제3국의 중개업자를 통해 중국에서 동생 김길자씨를 만났다. 이후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시간들이 다시 흘렀고 현미씨는 이 때문에 우울증까지 앓았다고 한다. 현미씨는 “평양냉면을 먹을 때마다 전쟁 중 헤어진 동생들을 떠올린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가수 현미. 사진은 2011년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대중음악전문공연장 올림픽홀 개관 기념식’에서 열창하는 모습

고인은 고령의 나이에도 힘 있는 목소리를 자랑했다. 2007년 데뷔 50주년 콘서트 ‘마이 웨이’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인은 “목소리가 안 나오면 모를까 은퇴는 없다. 나이가 80이든 90이든 이빨이 확 빠져 늙을 때까지 ‘밤안개’를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가수는 건강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팬들에 대한 보답”이라며 “사라지더라도 멋지고 떳떳하게 가는 것이 참모습이라 생각한다”고도 했다.

현미씨는 노래 실력만큼 화려한 입담을 자랑했고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주변 사람들에게 늘 유쾌하고 즐거운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20년 이상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현미의 파워 노래교실’을 진행하며 대중과 직접 만났다.

고인의 정확한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찰은 타살 정황이 없다고 보고 있다. 이봉조씨와의 사이에 아들 이영곤·영준씨를 두었다. 이영곤씨는 ‘고니’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한 적이 있다. 빈소는 서울 중앙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오경민 기자 5km@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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