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딜레마]③지긋지긋한 책임론, 그 뒤에 숨은 관료들

김병수 2023. 4. 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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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다는 행정관료들이 무서워하는 단어 '책임'
그렇게 정책 미션은 뒷전, 집단 보호는 우선 과제
교보 피하려고 삼성 불러들인 신(?)의 묘수까지
우리금융 CF 혁신편 중 [사진=우리금융 CF]

[아이뉴스24 김병수 기자] 행정 관료들의 처지를 모르는 건 아니다. 직업인 행정 관료는 필연적으로 그때그때 바뀐 정권의 정책 미션을 수행한다. 미션의 수준은 높을 수도, 비교적 쉬울 수도 있다. 어려운 미션을 잘 풀어내면 공무원으로서 자질과 능력을 높이 평가받는다. 어차피 고시라는 제도는 정부 행정을 하기 위한 자격 요건일 뿐이다.

왕정 시대엔 그 권력의 집권 시기가 상대적으로 길고, 지금은 5년마다 바뀐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요샛말로 코드라 불리는 영혼이 맞지 않으면 예전엔 낙향해 후학 양성에 힘썼고, 지금은 사표 쓰고 다른 직업으로 갈아탄다. 세월의 흐름에 모습은 달라졌지만,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혼 없는 관료라고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권력의 무리한 요구에 맞서 국익과 국민의 살림살이를 위해 얼마나 권력을 설득했느냐의 문제는 남는다. 대체로 일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이런 설득도 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직업인으로도 능력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이런 행정 관료들도 가장 무서워하는 건 역시 책임 문제다. 사실은 모든 직업인이 그렇다. 책임론에 휩싸이고 징계받아 흠집 나면, 앞길에 걸림돌이 생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책임론이 대표적이다. 당시 공직자들은 억울할 수도 있다. 외환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외환 자유화를 꼽는 이들이 많다. 기축통화가 아닌 원화의 자유화는 금융시장안정을 위해 충분히 돌다리를 두드려가며 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결과론이지만, 당시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에서 무리하게 속도를 내다가 탈이 난 것으로 분석한다.

이때 공직 사회의 충격은 대단했다. 당시 외환 관리 및 외환 정책을 맡았던 정책 담당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나라 팔아먹은 역적 취급에 괴로워했다. IMF 긴급자금을 받으면서 그들의 요구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외환은행 헐값 매각 논란은 아직도 국제 분쟁 중이다.

1997년 12월 3일 임창열(앞줄 오른쪽)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앞줄 왼쪽) IMF 총재가 550억 달러 긴급자금 지원과 관련한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당시 협상단에 참여한 고위 경제 관료들이 뒤에 도열했다. 마치 죄인처럼. [사진=MBC 뉴스]
2018년 11월 28일 개봉한 '국가 부도의 날' 영화에서도 경제 관료들은 나라를 팔아먹는 범죄자로 그려졌다. [사진=영화 국가부도의 날, 2018년]

우리은행을 사겠다고 덤빈 교보생명을 바라보면서 당시 정책 담당자들은 IMF 때 관료 선배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돈이 빵빵한 그룹도 아니고, 사모펀드를 끌어들여야 하고, 당장 팔아도 공적자금 원금 회수엔 턱없이 모자라고, TK(대구·경북) 정권이 들어섰는데 인수자는 호남이고,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딜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관료들은 일이 안 되는 쪽으로 키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금융연구원까지 동원해 머리를 굴리고 굴려 나온 답은 '희망 수량 경쟁 입찰 방식'. 2014년 3월 금융연구원은 '바람직한 우리은행 민영화 방안'이라는 정책 토론회를 열었다. 연구원이 제시한 입찰 방식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듣기 위한 자리다.

토론자로 나선 김상조 당시 한성대 교수는 "1인 대주주 지배체제보다는 경영감시가 가능한 기관투자자가 참여하는 과점주주 방식으로 매각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한 사람이 10% 이상의 지분을 갖게 되면 경영권 행사가 가능한 최대 주주가 되므로 최대 수량은 10%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윤석헌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는 "경영권 매각에 대한 유효경쟁 성립 요건이 충족될지가 관건"이라며 "국내 사모펀드의 인수 참여를 허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이런 자리에선 주요 토론자를 보면 대충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주요 정책 토론회인데, 토론자들은 이상하리만큼 정치적으로 반대 진영이다. 김상조 교수는 문재인 정부 초대 공정거래위원장 맡은 후 청와대 정책실장을 역임했다. 윤석헌 교수도 문 정부에서 관료 출신이 아닌 민간 출신 금융감독원장을 맡았다. 누가 봐도 오너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경제철학을 지닌 분들이다. 그래서 결과는 뻔하다. 윤 교수는 '유효경쟁 요건'을 맞추지 못해 이 매각이 무산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그래도 교보생명의 우리은행 인수에 비교적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자, 금융당국은 히든카드를 꺼내 들었다. '삼성이 교보생명의 우리은행 인수와 관련해서 금융당국에 항의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삼성생명의 고위 임원을 찾아갔다. 이 임원은 '항의'의 진위에는 답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삼성이 돈이 없습니까? 교보생명이 은행을 사서 경영할 수 있다면 삼성이 은행을 사지 못하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줘야 할 겁니다."

이것으로 게임은 끝났다. 삼성생명은 금산분리 문제로 이 입찰에 명함조차 내밀 수 없다. 삼성 측의 논리는 간단했다. 교보문고 문제를 꺼냈다. 교보생명그룹은 금융전업그룹으로 인식하지만, 법적으론 간단하지 않다. 교보문고는 엄연히 대기업이다. 삼성이 정말로 당국에 항의했는지, 면담 후 나오면서 항의가 됐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그렇게 또 관료들은 우리금융그룹의 경영연구소 자리를 활용했다. 현 김주현 금융위원장도 2012년 5월부터 3년간 예금보험공사 사장을 역임한 후 2016년 1월부터 3년 넘게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대표이사를 지냈다.

[우리 딜레마 글 싣는 순서]

①25년째 날개 못 편 불완전변태

②팔지도, 사지도 못한 官의 굴레

③지긋지긋한 책임론, 그 뒤에 숨은 관료들

④빛이 되지도, 우리도 아닌…

⑤임종룡의 '우리별'은 언제쯤… (끝)

/김병수 기자(bskim@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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