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백숙과 어머니와 제주 4.3
여기, 북한과 일본으로 찢긴 가족이 있다. 아들들은 북한에, 딸과 어머니는 일본에 산다. 일본에 살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는 북한의 묘지에 묻혀 있다. 이들을 찢어놓은 것은 이데올로기다. 오사카 조총련에서 열렬히 활동하던 부모님은 세 아들을 북한으로 보낸다. 감독 양영희는 오빠들을 순식간에 북한에 뺏긴 경험을 담담하지만 신랄하게 요약한다. "내가 6살 되던 해 세 오빠들은 북송 사업으로 북에 갔다. 대학생 건오는 김일성의 환갑을 축하하는 인간 선물로 뽑혀 강제로 가야만 했다." 감독은 묻는다. 왜 나의 부모는 그렇게도 강력하게 한국을 불신하고 북한을 지지하게 되었을까?
여든을 넘긴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내뱉는 대답은 제주 4.3이다. 한국에서 4.3 연구원들이 강정희 여사(감독의 어머니)의 증언을 듣기 위해 오사카를 찾아온다. 내내 일본어로 딸과 대화하던 그는 한국어로 또렷이 진술한다. 개울이 새빨간 피로 물들 정도로 민간인이 많이 학살되었다고. 경찰 손에 수많은 청년들이 끌려가 죽었다고, 제주를 벗어나 오사카로 도망치기 위해서 어린 동생 둘을 데리고 하염없이 걷는 길에 시신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고.
이날 증언 이후, 그는 치매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마치 평생 털어놓지 못한 트라우마를 겨우 발설하고 정신적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것처럼. 북에서 죽은 친동생이 집에 함께 살고 있다고 믿으며 그를 찾는 어머니를 비추는 화면 위로 감독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어머니는 망상 속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수프와 이데올로기'에 어머니가 상실한 가족만 나오는 건 아니다. 감독의 12살 연하 남편 아라이 카오루가 새로운 가족으로 등장한다. 감독의 아버지가 생전에 딸의 카메라 앞에서 "네가 좋으면 되지. 미국 놈하고 일본 놈은 안 돼"라고 말하는 초반부의 한 장면이 관객의 웃음이 터지게 만드는데, 카오루가 바로 그 '일본 놈'이다.
어머니는 사위를 위해, 닭백숙을 끓인다. 닭의 배를 갈라 마늘을 스무 개 넘게 듬뿍 넣고, 인삼과 대추를 넣어서 4시간 이상 끓여내 진한 국물을 우려낸다. '사위가 오면 씨암탉을 잡는다'는 옛 속담을 그대로 재현하는,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 모습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흥미로운 대목은 그 다음이다. 카오루는 장모님께 닭백숙 끓이는 법을 배워서 대접한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집안의 요리법이 전수되는 게 아니라, 장모님의 레시피가 사위에게 흘러간다.
예비 사위와의 첫 만남에서 강정희 여사가 북한에 있는 아들 가족들이 모두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말할 때, 카오루는 아무 말 없이 웃으면서 들었다고 한다. "만날 수 없는 가족의 사진과 살아가는 어머니를 그는 가슴 아파 했다.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감독 부부와 어머니는 함께 자전거로 장을 보러 가고, 음식을 해 먹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단란한 시간이 흘러가다가 영화가 마지막에 당도하는 곳이 제주도다. 셋은 제주 4.3 추모식에 함께 참여한다. 비석이 빼곡한 넓디넓은 묘지, 거의 천장까지 희생자들의 위패로 뒤덮인 봉안소 장면은 화면 너머 관객까지 충격과 슬픔으로 압도한다.
감독이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서 감정을 내비치며 눈물을 터뜨린다. 제주 4.3을 겪고 오사카로 도망 온 조총련 활동가들을 보면서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이제야 알겠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어떻게 이런 고향을 품고 평생을 살아온 건지 헤아릴 수 없고, 어머니가 왜 그렇게 남한 정부를 믿지 못했는지 알겠다고 고백한다. 부모님은 도대체 왜 오빠들을 북한에 보냈는지 평생 품은 원망도, 제주에서 처음으로 녹을 기미를 보인다.
어머니가 평생 바랐던 것은 그저 '수프'의 시간 아니었을까. 사위 카오루와 닭백숙을 나눠 먹는 식사 시간 같은. 그러나 그는 열여덟의 나이에 이데올로기가 빚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참극을 몸으로 겪어냈고, 그 트라우마의 기억이 그를 남한 정부에서 가능한 가장 먼 북한 정부로 이끌고 간 것 아닌지.
감독은 어머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언정 시종일관 어머니에게 정중한 예의를 갖춘 다큐멘터리를 탄생시켰다. 그 덕분에 관객들은 영화를 다 보면 어떤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고향 제주를 떠나야 했던 난민이자 4.3의 생존자, 북한의 가족들에게 송금하기 위해 평생 열심히 일했던 어머니이자 뜨끈한 닭백숙을 끓이는 장모님, 역사가 사정없이 할퀴었지만 숱한 상처와 함께 살아남은 한 여성의 모습을.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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