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서 금관 꺼내자 갑자기 날벼락…조사원은 줄행랑쳤다
반세기전 경주 황남동 155호 고분 발굴 현장
“신라인 혼이 노여움 표현했나…신비감·두려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1500년 된 신라 무덤 속에서 금관을 꺼내어 들고 나오던 20대 조사원은 벌벌 떨면서 사색이 됐다. 그의 머리 위 하늘에서 갑자기 번쩍거리면서 굉음을 내는 천둥·번개를 쏟아낸 것이다. 금관을 솜 상자에 담아서 조심스럽게 봉분을 내려오던 조사원 윤근일은 금관 상자를 봉분 한쪽에 올려 놓고 바로 무덤 앞 현장 사무실로 줄행랑을 쳤다. 그의 등 뒤로 뇌성과 함께 소나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1973년 7월27일 초저녁이었다. 신라 천년 고도인 경북 경주시 황남동 155호 고신라고분(천마총)에서 벌어진 기묘한 기상 이변은 후대인들에게 신비감과 두려움을 안겼다. 하늘을 나는 말 그림 천마도와 가장 풍성한 장식미를 자랑하는 신라 금관이 나온 천마총의 핵심 유물을 꺼내는 순간 신라인의 혼이 하늘을 통해 노여움을 표시한 것일까. 당시 금관을 수습해 옮긴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유물상자에 캐시밀론 솜을 깔고 금관을 놓은 뒤 들고 나오는 순간이었지요. 맑은 하늘에 벼락치고 번개가 번쩍이면서 소나기가 억수 같이 내렸어요. 금은 전기가 제일 잘 통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죽지 않으려고 유물상자를 놓고 그냥 아래로 뛰었어요. 장가도 안갔는데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본능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한참 지나 숨을 돌리고 있으니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말끔히 개었어요. 그때 엄숙한 마음으로 조심조심 봉분으로 다시 올라가서 소나기를 맞은 금관 상자를 들고 내려왔습니다.”
155호분 발굴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구상한 경주관광종합개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대형 고분을 파서 내부의 찬란한 신라유물들을 발굴하고 유적 전시관으로 활용해 관광객들에게 내보인다는 구상. 원래 시내에서 최대급 대형분인 98호 쌍분을 대상으로 진행하려 했다. 규모가 너무 크고 발굴 경험이 부족해 좀 더 작은 155호분을 시험 발굴해 보자는 김정기 당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장을 비롯한 학계의 건의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발굴은 그해 4월6일부터 12월4일까지 진행됐다. 뜻밖에도 역대 발굴품 중 최고의 장식미를 지닌 신라 금관과 신라 회화사의 정점인 천마도가 그려진 장니(말을 탄 사람에게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실용적 장식구)와 채화판 등의 대표 명품과 1만1000점 넘는 고급 유물들이 한여름인 7월과 8월에 쏟아져 나왔다. 이런 와중에 금관을 반출하는 7월27일 마른하늘에서 낙뢰와 소나기가 쏟아진 것이다. 동료 조사원이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이와 관련해 색다른 증언을 내놓았다.
“발굴하던 해는 가뭄이 극심했어요. 시민들이 왕릉 파서 날이 가물다 원망하면서 데모할 정도였지요. 7월27일 금관 들어내는 날 갑자기 먹구름 몰려와 천둥 치고 소낙비 내리니 놀랐지요. 신라고분서 네번째 출현한 금관인데요. 아마 크기도 제일 크고 영락, 곡옥 등 붙이는 장식이 가장 풍성하게 달린 금관이라서 압권이라고 생각하지요. 희한하게도 천둥비가 내리고 나서 발굴을 비판하는 여론은 잠잠해지고 조사는 순조롭게 진행됐어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은 일종의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실제로 그해 천마총 발굴은 한국 고고학사상 처음으로 실측과 구획발굴 등 체계적인 조사계획과 세부 지침 아래 진행됐다. 이 발굴로 실체가 모호했던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 무덤 부장 공간, 부장품의 성격 등에 대해 풍성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최 교수의 말대로 1974~1975년 인근의 황남대총 발굴 성과까지 더해지면서 신라 고고학체계의 틀을 잡는 획기적인 계기가 된다. 올해로 발굴 50주년을 맞는 경주 천마총 조사의 기억과 관련해 지난달 21일 낮 경주시는 현재 한국 고고학계의 레전드(전설)가 된 당대 발굴 주역 생존자 6명을 역대 처음 한자리에 초대해 공개 대담 행사를 열고 개별 인터뷰도 녹화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5~6월 경주 천마총 인근에 개관하는 고분종합정보센터의 실감 영상에 당시 활약상과 일화를 기록하기 위한 자리였다. 당시 발굴 조사단원 8인 중 작고한 단장 김정기 박사, 도면 담당 박지명 관장을 빼고 김동현(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건길(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윤근일, 최병현, 남시진(계림문화재연구원장), 소성옥(전 조사단원)씨가 참여해 당시 일들을 돌이키며 그 시절 기념사진 배치대로 서서 사진을 찍었다.
대담과 인터뷰에서 주목된 것은 그동안 대외적으로 당시 상황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던 여성 조사원 출신 소성옥씨와 실측과 도면제작을 담당했던 남시진씨가 내놓은 비화들이었다. 소씨는 당시 현장에서 금관과 천마도의 수습과 보존처리에 힘썼던 기억을 풀어냈다. 부장궤에 압착해 있던 천마도를 수습하면서 중탄산 약품을 활용하는 등 당시 화학적 정보를 취합해 직접 그림 표면에 1차 보존처리를 했다고 털어놓으면서 “지금 전시된 천마도 색감과 달리 막 노출되었을 때는 1500년 전 막 묻혔을 당시 생동감 있는 원색의 황홀경이었다”고 증언했다. 이화여대 스승 진홍섭 선생의 추천으로 경주에 왔을 때 취사용 시설이 전무해 한참동안 남성 조사원들은 신경쓰지 않는 밥일과 설거지 등까지 신경 쓰느라 힘들었다는 기억을 꺼내기도 했다. 남시진씨는 “처음 실측을 위해 천마총 봉분 정수리에 말목을 박아야 하는데 남의 집 무덤을 해코지 하면 안된다며 다른 경주 지역 기사나 장인들이 작업을 외면해 결국 내가 직접 나서서 말목을 박고 실측을 시작했다”면서 조상 묘를 절대 손대면 안된다는 지역민들의 완고한 정서도 작업을 가로막는 요인이 됐다고 증언했다.
백발이 성성해진 천마총 발굴의 레전드 조사원들은 입을 모아 당부했다. 50년 전 발굴 성과를 놓고 여러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지만, 당시 온 힘을 모아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사실은 후학들이 인정해주길 바란다고. 이들은 6일 경주 힐튼호텔에서 다시 모여 문화재청 주최 회고 대담을 펼칠 예정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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