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공 좀 차고 싶은 그녀들
(고양=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때려, 때려!" 함성에 혜림 씨가 오른발로 슛을 때렸다. 발에 잘 맞은 공이 쭉 뻗었다. 공은 골대 옆 그물을 맞히고 나갔다. 그녀는 아쉬워했다.
승혜 씨가 앞을 가로막은 소현 씨를 피해 공을 옆으로 툭 찼다. 그러고는 재빨리 움직여 소현 씨를 제친 뒤 공을 몰고 달려갔다.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녀들이 축구를 즐기고 있다. 필라테스, 등산처럼 혼자 하는 운동보다 팀플레이인 축구에 빠졌다.
축구선수 출신 코치에게서 기본 스텝, 공 다루는 법, 전술 전략을 배우며 공을 차고 있다.
왕초보도, 마니아도 모두 즐겁다…여자들끼리 축구
월요일 저녁 8시. 3월의 밤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도심 대형마트 옥상 풋살장에 고무줄로 묶은 긴 생머리,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 짧게 친 머리를 한 그녀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손에는 신발주머니를 하나씩 들었다. 여자 풋살·축구 클럽인 제이앤스포츠클럽 일산 블랙 팀의 축구 수업 시간이다.
그녀들은 초록색 인조 잔디에 앉아 신발을 바꿔 신었다. 인조 잔디용 축구화와 비슷한 바닥 전체에 작은 돌기가 있는 실외용 풋살화다. 풋살은 실내 축구를 말하지만, 국내에는 야외 인조 잔디 풋살장이 대부분이다.
축구선수 출신 정환 코치, 동민 코치의 지도에 따라 그녀들이 공 다루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두 발의 안쪽 면으로 몸에서 벗어나지 않게 공을 톡톡 차보고, 바깥쪽 면으로는 공을 살살 건드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풋살화 바닥 면으로 공 굴리기 연습도 했다. 껑충껑충 뛰며 양발 발바닥으로 번갈아 공을 굴렸다. 풋살에서 많이 사용하는 기술이다. 분홍색, 흰색 공이 연두색, 주황색, 빨간색의 예쁜 풋살화에 이끌려 두발 사이에서 이리저리 놀았다.
패스 훈련에서는 두 명씩 짝을 지었다. 정환 코치가 서로 이름을 부르며 패스하라고 주문하자 고은 씨가 "유진"하며 오른발 인사이드로 공을 건넸다. 유진 씨는 오른발 발바닥으로 공을 받아 세운 뒤 "고은"하며 되돌려 주었다.
훈련의 마지막은 1대1, 2대3의 미니 게임이었다. 혼자서 상대를 제치고 골을 넣거나 동료와 패스하며 득점하는 게임이었다.
이번에는 공격을 맡은 소현 씨가 드리블로 승혜 씨를 제치고 달려갔다. 그러자 승혜 씨는 소현 씨의 팔을 냉큼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 달라붙었다. 공을 향해 달려가던 둘은 넘어질 듯하면서 한바탕 신나게 웃었다.
축구할 때 가장 짜릿한 순간에 관해 묻자 승혜 씨는 "수비수를 제치고 드리블해서 치고 나갈 때 진짜 희열감이 들어요"라고 말했다. 소현 씨도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를 쳤다.
90분간의 훈련이 끝나고 마지막 30분 동안은 5명씩 세 개 팀으로 나눠 풋살 시합을 했다.
축구 선수들만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녀들은 훈련에서 배운 기술을 제법 구사했다. 상대를 보고 공을 세운 뒤 방향을 전환하거나 드리블했다. 동료와 패스를 주고받으며 앞으로 나가거나 공을 돌렸다.
골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찌어찌 골문 앞까지 공이 가자, 연두색 조끼 팀의 희랑 씨가 슛을 날렸다. 공은 골키퍼인 정환 코치를 지나 그대로 골인이 됐다. 같은 색 조끼를 입은 팀원 5명이 손을 마주치며 환호했다.
목요일 저녁 일산 레드팀의 수업에는 축구 왕초보인 여성들도 6명이나 처음 풋살장에 나왔다. 왕초보들은 기본 스텝부터 시작해서 공 차는 법을 배우고, 마지막에는 기존 회원들과 어울려 여자들끼리 하는 축구에 섞여 들었다.
겨울 동안은 축구 수업이 없어 쉰 혜림 씨는 골대 크로스바에 매달려 "오랜만에 나와서 너무 신나요"라며 스트레칭을 했다.
풋살장을 한참 뛰어다니다 잠시 쉬고 있는 그녀들에게 축구의 매력에 관해 물었다.
보경 씨는 "동료와 함께 계속 뛰면서 서로에게 에너지를 줘서 활력이 충전되는 느낌이에요"라고 답했다. "팀워크가 필요한 운동이라 동료와 금방 친해지고 끈끈함도 생겨요"라고도 했다.
개인 운동을 주로 했던 혜림 씨는 "단체 구기 운동은 완전히 달라요. 상대편에 따라 전술 전략이 달라지는 게 특히 매력적이죠"라고 말했다.
소현 씨는 인스타그램에 축구하는 모습을 올리자 "친구들이 멋있다고 했다"며 웃었다. 승혜 씨는 "취미 부자라고 부러워했다"며 즐거워했다.
여자인데 어디서 축구를 배울 수 있을까?
일산 레드팀 캡틴을 맡고 있는 정현 씨는 축구광이다. 그는 학생 때부터 친구와 둘이 골대 앞에서 공을 차고 놀았다고 했다. 축구광인 정현 씨이지만 여자가 축구를 배우기는 쉽지 않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일반 여성을 위한 축구 클럽이 없었던 탓이다.
요즘은 제이앤스포츠클럽처럼 여성 회원만을 대상으로 축구와 풋살을 가르쳐주는 스포츠클럽들이 전국에 많이 생겨났다. 이 클럽만 해도 수도권 30개 지역에 50개 팀이 활동하고 있다. 2017년에 시작해 누적 회원 수가 6천명이 넘는다.
대한축구협회에 따르면 2022년 기준으로 여성 축구동호인 등록선수는 5천10명이다. 이에 비해 남성은 12만7천559명으로 25배 넘게 차이 난다.
여성들이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월드컵보다 방송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덕이 크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축구 선수 출신 감독의 지휘로 여자 연예인들이 풋살 경기를 펼친다. 풋살장에서 만난 여러 명이 "'골때녀'를 보고 여자인 나도 축구를 할 수 있겠구나,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했다"고 밝혔다.
본래 풋살은 축구장 절반 정도 크기의 매끈한 바닥인 실내에서 5대5로 하는 축구를 말한다. 풋살용 공은 축구용보다 약간 작고 무게도 가볍다. 규칙도 조금 다르다. 실내 경기장이 적은 우리나라는 풋살 규격의 야외 인조 잔디 풋살장에서 주로 시합한다.
풋살은 축구보다 참여자들이 공을 만져 볼 기회가 훨씬 많아 축구 동호인들에게 인기 있다고 한다. 노양래 제이앤스포츠클럽 사무국장도 여성들이 축구를 쉽게 즐길 수 있게 된 이유 중 하나로 풋살을 꼽았다.
노 사무국장은 생활 축구 저변화를 위해 유럽에서 연수하는 동안 "여자들이 남자들처럼 축구를 즐기는 것을 보고 여자들끼리 하는 축구 스포츠클럽을 개설했다"고 말했다.
일산 블랙팀을 지도하는 정환 코치는 내향적이든 외향적 성격이든 상관없이 "축구에 호기심만 있다면 일단 와서 공 좀 차 보시라"고 권했다. 1회 무료 체험도 있다고 했다.
이 클럽 회원인 이샘 씨는 축구에 호기심이 생겨 시작했다가 규칙을 잘 알고 싶어서 5급 심판 자격까지 획득했다.
축구를 시작한 지 5년 정도 된 보경 씨는 정작 축구 경기를 뛰어볼 기회는 거의 없지만 풋살 동호인들이 '소셜매치'라 일컫는 시합을 자주 한다고 했다.
소셜매치란 플레이어가 풋살 경기를 주선해주는 업체의 앱을 통해 경기장, 경기 시간을 골라서 참가하는 시합이다. 마치 온라인 게임방에 들어가듯이 오프라인에서 풋살 경기에 참여하는 새로운 문화다. 2시간에 1만원 정도의 게임비를 내고 참가한다.
업체 매니저의 주관하에 처음 만난 사람과 팀을 이루기도 하고 친구들과 한 팀을 구성해 뛰기도 한다. 어느 정도 실력이 되면 용병으로도 참가할 수 있다. 시간에 상관없이 새벽에도 시합이 열릴 때가 있다고 한다.
경기는 주로 6대6 인원으로 3쿼터를 치른다. 두 개 팀이 대결하는 게 아니라 세 개 팀이 한 쿼터당 10~12분 정도로 돌아가면서 3파전으로 진행된다. 두 팀이 대결하는 동안 한 팀은 쉬는 방식으로 2시간 동안 공을 찬다. 남성, 여성 팀들 간의 대결뿐만 아니라 남녀 혼성 경기도 가끔 있다.
부상 위험을 줄이고 축구를 즐기려면
성인 남성들도 부상 위험 때문에 축구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정환 코치는 "축구나 풋살은 나도 모르게 공을 향해 달려들다 다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기 때문에 주변에서 적절히 코치해주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특히 운동 전에 충분한 스트레칭과 발목 운동으로 몸을 푸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부상 위험을 줄이며 풋살을 즐기기 위해서는 발에 맞는 풋살화는 필수다. 정강이 보호대나 발목 보호대, 발목 테이핑도 도움이 된다.
일산 레드팀 회원들은 고양시 축구협회 소속 남성들과 축구 경기도 했다. 풋살에 익숙한 탓에 축구와 넓은 경기장에 대한 경험이 적어 다소 힘들어했다. 경기 내내 운동장을 열심히 뛰어다녔던 혜림 씨는 "잘하시는 분들과 하면 배려해 주기 때문에 다칠 위험이 적어 좋다"며 즐거워했다.
그녀들에게 "다치는 거 안 무서워요"라고 물었더니 "다쳐서 축구를 다시는 못할까 봐 무서워요"라며 웃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zj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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