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 양영희 “조직 조국은 모두 헛소리, 행복해지는 게 의무”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이 사람이 누구지, 하면서도 일단 만납시다, 라고 답변을 보냈다. 이메일 답신을 보낸 뒤, 서둘러 그의 명함을 찾아봤다. 유명 출판사 가도카와 쇼텐(角川書店)의 편집자. 더구나 그는 막내 편집자가 아니었다. 정확히 두 달 만이었다.
“소설을 한 번 써보지 않겠어요?” 첫 극영화 「가족의 나라」가 요미우리문학상 희곡·시나리오상을 수상하면서 2013년 2월 도쿄 제국호텔에서 열린 수상식에 참석했다. 샴페인을 마시면서 심사위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가 다가왔다. 영화 잘 봤습니다, 라며 명함을 건넨 뒤 불쑥 소설 쓰기를 제안하는 게 아닌가. “소재는 자유롭게 선택하시고요.”
나에게 소설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다니. 권위 있는 상도 받은 데다가 술도 적당히 마신 터라 기분이 좋아진 작가 양영희는 망설이지 않고 오케이, 라고 답했다. “다만, 지금은 영화제 준비로 너무 바쁘니, 두 달 뒤에 한 번 더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어떤 이야기를 하실 겁니까.” 약속 장소에 나가니 그가 다른 편집자들을 대동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밥을 먹으면서 그가 물어왔다. “이런 거 어때요.” 양 작가는 조선대 시절의 체험에 사랑 이야기를 섞어서 쓰고 싶다고 대답했다. 대학 1, 2, 3, 4학년을 각각 1장씩 전체 4장으로 하고, 옆 대학의 일본인 남자와 연애를 시키고, 3학년 땐 졸업여행으로 북한에 다녀오게 하고, 졸업식 땐 타협 없이⋯.
“북한을 지지하는 커뮤니티에서 나고 자란 양 작가님은, 언제 어떤 계기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까.” 2005년 다큐멘터리 영화 「디어 평양」을 발표한 이래 줄곧 비슷한 질문을 받아왔다. 지난해 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공개되고,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를 출간했을 때에도.
학창 시절의 ‘진로 지도’가 계기였다고 간단히 답할 순 있었다. 하지만 그 대답을 상대편이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어떤 학창 시절을 보냈고 어떤 진로 지도를 받았는지를 부연 설명해야 했다. 그 설명이 길고 구구할 수밖에 없었다.
수용소 같은데, 이거 소설이나 영화 같지 않아. 너무 이상한 상황 아니야. 도쿄 고다이라(小平)시에 위치한 총련 계열의 조선대 재학 시절부터 늘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재미있고 개성적이었다. 얇고 낮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에는 일본 대학 가운데 가장 자유분방한 미술대학이 붙어 있고. 4년을 버티면서 마음속에 하나의 이야기 씨앗이 계속 머물러 있었다. 언제 어떤 형식으로 발표할 수 있을까.
“저는 작가가 되고 싶다거나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슨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다큐멘터리나 극영화도 만들고 소설과 에세이도 썼지만, 어떤 이론이나 카테고리가 있었던 게 아니라 이야기가 먼저 있었어요. 예를 들면, 다큐멘터리 영화 「디어 평양」을 본 사람들은 아시겠지만, 제 아버지는 아주 개성이 강해요. 북한 정부에서 받은 훈장을 단 모습과 집안에서 잠옷을 입은 모습이 너무 대조적이어서 직접 보여줘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다큐가 된 거죠. 아버지 어머니야 늘 가까이에 있으니 직접 찍을 수 있었고요.”
소설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소설을 처음 쓰는데다가 스스로 문장력도 별로라고 생각한 터라 불안했다. 그해 여름 초고 5000자쯤 샘플로 써서 출판사에 보여줬고, 출판사가 괜찮다고, 그냥 쓰시라고 한 뒤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집필은 더디게 이뤄졌다. 어머니가 입원과 퇴원을 거듭해 오사카를 자주 왔다 갔다 해야 했고, 아르바이트나 번역을 하면서 생계도 꾸려야 했다. 출판사 편집 담당자들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줬다. 한 번도 빨리 써 달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게 5년.
시나리오 작가 미영은 대본을 완성한 뒤 바에 갔다가 졸업 여행을 준비하는 여학생들을 보고서 자신의 대학 시절을 떠올린다. 연극에 탐닉했던 자유분방한 그녀는 까다로운 규칙과 마찰하면서 조선대에서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지만, 학교 앞 라멘집에서 무사시노대학의 구로키 유를 만난다. 혐오 집단의 공격 속에서도 구로키와 굳건히 연애를 이어가던 미영은 2학년 여름 “자이니치든 조선인이든, 그건 신경 안써”라는 그의 말 한 마디에 상처를 입는다.
“알아! 알지만,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잖아⋯ 나는 유가 일본이라는 걸 신경 써.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그건 무리야. 그러면 실례인 것 같아. 만약 내가 ‘유가 일본인이라도 상관없어’라고 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146쪽)
3학년 땐 가을 북한으로 졸업여행을 갔다가 ‘조국’의 현실에 경악하고 언니를 만나선 “행복해지는 게 네 의무”라는 말을 듣는다. 연극 일을 하고 싶었던 그녀는 4학년 졸업을 앞두고 모교 교원이 되라는 진로지도를 받으며 일생일대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공부도 연애도 마음껏 해! 미영이는 나처럼 되면 안돼. 너 자신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어⋯즐거운 건 뭐든 다 해. 행복해지는 게 네 의무야⋯ 너는 내 분신이니까. 내 몫까지 행복해져야지! 조직이라는 둥 가족이라는 둥 바보 같은 말을 하면 용서안할 거야.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 알았지?”(196쪽)
―시나리오 쓰는 것과 소설 쓰는 게 많이 달랐을 텐데.
“소설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나리오도 혼자 쓰지만, 프로듀서도 있고 다음 단계에 들어가면 고치기도 하고 캐스팅에 들어가서도 집단 작업으로 하는 등 몇 개의 단계가 있는 것과 달리, 소설 창작은 철저하게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써야 했다. 어느 시점부터 시작할지, 어디에서 몇 번 장면을 그릴지, 모두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배우들이 연기하고, 조명 감독이 조명을 비추고, 촬영 감독이 촬영하는 것 모두를 혼자 결정해야 했다. 반대로 무한한 자유 역시 있었다. 갑자기 돈한 푼도 안 들이고 SF로 할 수 있고 시대극도 할 수 있지만. 소설 쓰는 작가에게 ‘선생님’을 붙이는 이유를 알겠더라.”
―체험과 상상을 버무렸다고 했는데, 소설 속에서 사실과 상상은 어디까지인가.
“연극을 탐닉하는 미영은 제가 모델이지만, 구로키 유는 실제 모델이 없다. 대학 시절 무사시노대학 학생과 연애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때에도 바로 옆의 일본 대학생들과 왜 친구가 되지 못할까, 연애를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망상을 하긴 했다. 학교 규칙은 모두 사실이고, 미영을 못 살게 구는 학생위원회 사람들이 한 대사 역시 직접 경험한 것들이다. 3학년 때 북한에 졸업여행을 갈 때 신의주에 기차로 간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고. 소설 속 언니가 행복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론 오빠가 저한테 한 말이었다.”
―실제 조선대 재학 시절은 어땠는지.
”인간 교육, 사람 교육을 해야 하는데, 많은 나라에서 국민 교육을 한다. 왜 국민이 국가에게 이바지하도록 해야 하는가. 국가가 국민들에게 이바지하도록 해야 한다. 선진국이라면 국민 교육이 아닌 인간 교육을 해야 한다. 저에게 많은 문제의식을 준 중요한 경험이었다. 사실 우울증에 걸릴 뻔했다. 어떻게 하면 학교를 그만둘 수 있을까, 생각만 했다. 그래도 4년이라는 기한이 있으니까, 졸업까지 한 번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4년을 버텨야 조직의 안을 좀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저는 4년이라는 기한이라도 있었지만, 기한도 없이 평생 북한에서 살아야 하는 오빠들처럼 북송으로 북한에 간 사람들을 많이 생각한 것도 조선대 4년 동안이었다.“
―소설에서 미영은 왜 구로키가 “미영이 자이니치든 조선인이든, 그런 건 신경 안 써”라는 말에 화가 났을까.
“메이저리티들은 ‘신경 안쓴다’는 말을 ‘나는 너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좋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저도 살면서 몇 번이나 그런 말을 들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악의 없는 친구나 애인한테도 들어본 적도 있고, 심지어 같은 교포끼리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의도적인 건 아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에서 조금 우월감, 거만함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하고 미묘한 차별의식 같은 것도 느껴진다. 신경 안 쓰니까 귀찮은 이야기 하지 마, 그런 뜻일 경우도 있다.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도 담겨 있고. 같이 있는 친구나 일본인 가족은 각자 갖고 있는 배경과 살아온 것을 신경 쓰면서 이야기한다. 그것이야말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신경 안 쓰는 우정이나 연애 관계보다, 신경을 쓰는 우정 연애가 더 존중하는 게 아닐까. 무의식적이고 악의 없는 차별 의식에도 민감해야 된다고 생각해 그 말을 꼭 넣고 싶었다. (구로키의 말 때문에 결국 헤어진다) 그때 미영도, 구로키도 2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미영은 그때 화가 난 단계까지 간 것도 아니고 조금 불쾌했을 뿐이다. 그 불쾌감을 갖는 자기가 이상한 것이지, 자신의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히 모른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들으면서 기분이 나빠지고,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만약 두 사람이 40대라면 대화로 해결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이들은 20대라서 자기 마음도 이해를 못하고 상대방의 말도 모르고 풀어나갈 말을 찾지 못한 것이다.”
―미영은 결국 졸업식에서 ‘조직 위탁’을 거부하는데.
“제가 실제 그렇게 하지 못해서 그럴 수 있었으면, 하는 제 희망 사항을 그렸다. 졸업식 전까지 싸웠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타협했다. 어른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여러 사람이 조언도 하고, 저도 지금보다 순진한 여학생이어서. 대신 어른들이 하는 대로 학교 선생을 해보다가 그래도 연극을 하고 싶다면 그땐 정말 도전을 하자고 생각했다. 학교 선생이 됐고, 결혼도 했다. 하지만 모두 맞지 않는 옷이었다. 2년 반 동안 학교 선생으로 열심히 생활했지만 결국 그만뒀다. 제 생각을 강요하는 것 같았고, 조직 안의 모순도 보였다. 이혼 후부턴 하고 싶은 일만 하자고, ‘조직이나 회사, 가족을 위해서’ 하는 말 따위는 인생에서 지워 없애자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보통 우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라는 그 말에 제가 들어있나, 항상 궁금하더라. 총련 안에서 제 작품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 이야기를 그렇게 그리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저는 영화도 소설도 우리 이야기는 해본 적이 없다. 우리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니까 당신이 저하고 똑같은 생각을 할 필요도 없고, 당연히 제 작품을 싫어해도 좋고, 자유롭게 느끼시라고 말한다. 우리 민족이나 국가, 마음, 생각 등 우리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는데, 익숙해지지 말아야 된다. 익숙함이 무섭다.”
“폭로나 고발이 목적이 아니다. 작품으로 재미있게 읽어줘야 한다. 다만, 이 대사를 하기 위해서 작품을 썼다고 하는 대사들이 있다. 예를 들면, 구로키가 ‘자이니치든 조선인이든, 그런 건 신경 안써’라고 말하는 대사가 그것이다. 결국 (소수자성을) 조금 더 신경 써 달라는 얘기다. 이 대사를 위해서 미영에게 애인이 필요했고, 그 애인은 같은 학교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옛날부터 일본 사회 안에 한국인들이 있었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 존재해 왔다. 투명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선 우리가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목소리도 내고 글도 쓰고 영상으로 남겨야 한다. 북송 사업으로 9만 명 이상이 일본에서 북한으로 이주를 했지만, 그들의 존재도 활동도 모두 덮여져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투명 인간처럼 취급되는 이들의 이야기를 좀 꺼내고 싶었다.”
―일본에선 5년 전에 출간됐는데, 독자들의 반응은.
“조선대 출신의 선배 작가 몇 명이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고, 조대를 대담하게 그렸다고 놀라워하더라. 일본인들은 소설 속의 조선대가 픽셔너블한 학교라고 생각할 것 같지만, 자신들이 다녔을 때는 저보다 더 엄격했다고 하더라. 조선대 동창생 가운데 일부는 정열적으로 응원하지만, 많은 이들은 눈치를 보면서 커뮤니티 안에서 양영희 작품을 어떻게 본다거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어쨌든 모교이지만 동창회 소식도, 동창회 안내장도 오지 않는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 어쨌든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일본 독자 가운데 고민으로 인한 자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감상이 기억난다.”
무엇보다 연극과 영화가 좋았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극장을 열심히 다녔다. 극장 티켓을 사기 위해서 고등학교 때에는 아르바이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수업만 끝나면 연극과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내달렸다.
세 오빠가 북송사업으로 모두 북한으로 이주한 상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마저 열심히 총련 활동을 하면서 집을 자주 비우는 바람에 그는 늘 집에 혼자 있어야 했다. 집에 있으면 오빠들 생각으로 견딜 수 없어서 더욱 극장으로 달려갔다. 일종의 현실 도피였다.
여학생 양영희가 연극과 영화에 탐닉하던 당시는 대극장의 뮤지컬부터 언더그라운드의 독특한 연극, 심지어 천막 속의 연극 무대까지 다양한 형태의 연극과 무대가 쏟아지던 시기였고, 아트 시네마 역시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대였다. 그는 연극은 종류와 내용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두 섭렵했고, 영화는 해외 영화를 중심으로 부지런히 챙겨봤다. 영화감독이자 작가 양영희의 원점이었다.
도쿄의 조선대를 졸업하고 오사카조선고급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얼마 간 근무한 뒤, 오랜 꿈이었던 극단에 뛰어들어서 제작과 배우 생활을 경험했다. 뉴욕 뉴스쿨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2004년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1964년 오사카 이카이노(현재 이쿠노구)에서 자이니치 2세로 태어난 양영희는 2005년 다큐멘터리 영화 『디어 평양』를 발표하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영화 「굿바이, 평양」(2009),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극영화 「가족의 나라」(2012) 등을 발표했다. 산문으로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 『가족의 나라』 등을 펴냈다. 베를린영화제 최우수 아시아 작품상,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베를린영화제 CICAE상, 요미우리문학상 희곡·시나리오상,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상, 마이니치영화콩쿠르 다큐멘터리상 등을 수상했다.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한 방법이나 원칙이 있다면.
“일단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앞으로 계속 써 나가는 것도 빡빡했다. 같은 어휘들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저의 경우 소설과 시나리오 작업이란 장면과 영상이 머리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글로 옮기는 작업이다. 작품이란 이미 보고 들은 것들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어딘가 닮은 게 나올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오리지널리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영화도 소설도 오리지널리티가 중요하다. 내용이나 분위기가 닮았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양영희답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래서 어떤 감동적인 영상을 보면, 어떻게 하면 그것과 다른 것을 만들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한다.”
―10년 후는 어떤 모습일까.
“10년 후에는 영화 작품이 몇 개 더 발표돼 ‘양영희 특집’이 회고전처럼 상영이 되고 있으면 좋겠다(웃음).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근데 소설은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 시나리오는 시나리오로 끝나지 않고 영화화돼 개봉까지 돼야 한편이 끝나는데, 소설은 그 전체만큼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소설도 쓰고 싶은 소재들은 있다.”
도쿄에 사는 영화감독이자 작가 양영희는 ‘아웃도어 인간’이 아닌 전형적인 ‘인도어 인간’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하는 마을 산책을 제외하면 주로 건물 안에서 생활한다. 햇빛을 싫어하고, 헤엄칠 줄도 모르며, 자연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다. 많이 자지 않으면 기분이 안 좋아지는 그녀는 휴일이면 늘어지게 잔 뒤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거나 음악을 들으러 콘서트 장에 갈 것이다. 조국이나 조직에 결코 충성 같은 것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현재 소설이 아니라 극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행복해지는 게 너의 의무”라는 오빠의 말을 간직하고서. 내달 일본 극장에서 공개될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 리마스터판 배포를 위해 자막 작업이 한창이다. 아마 작품이 나오면 홍보 활동과 인터뷰, 강연이 이어지겠지만. “행복해지는 게 나의 책무”라고 다짐하면서.
“지금부터 시나리오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이미 올해 들어 강의를 비롯해 다른 일들을 거절하기 시작했어요. 소설과 관련한 인터뷰 역시 이게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고요. 팬데믹 때문에 북한의 오빠들과 연락이 안 돼 걱정인데, 잘 버티고 있으리라 믿어요.”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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