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에 ‘노인 대접’ 요구···무리수 둔 숙종·영조[이기환의 Hi-story](77)

2023. 4. 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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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耆老)’라는 말이 있습니다. ‘늙을 기(耆)’에 ‘늙을 노(老)’이므로 노인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1719년(숙종 45) 4월 18일 숙종이 59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입소한 뒤 그 기념으로 기로신 10명을 초청해 잔치를 벌인 모습을 그린 중 ‘경현당석연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예기> ‘곡례 상’은 “60세는 기(耆)이며, 남에게 일을 시켜도 되는 나이(六十耆指使)이고, 70세는 노(老)이며, 자기 일을 넘겨주고 은퇴하는 나이(七十曰老而傳)”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즉 ‘기로’는 예순 살(60)이 넘어가면 노인 대접을 받고, 일흔 살(70)이 되면 정년퇴직한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70세가 되더라도 물러나지 않는 법이 있긴 있었습니다. 임금에게서 궤장(?杖·의자와 지팡이)을 하사받는 것인데요(<예기> ‘곡례·상’). 예컨대, 신라 문무왕은 664년 70세가 돼 은퇴를 결심한 김유신(595~673)에게 궤장을 하사했습니다(<삼국사기> ‘열전·김유신’조). 은퇴하지 말고 임금이 내려준 지팡이를 짚고 출근해 의자에 앉아 근무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삼달존’의 조건 그건 예외였습니다. <증보문헌비고> ‘직관·치사’조는 “70세가 되면 은퇴하고, 비록 70세가 되지 않더라도 사직을 청하면 대부분 허락한다”고 설명했습니다.

70세 이상의 은퇴 관리 중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기로소’로 입소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원로원이라 할까요.

물론 자격요건을 채우더라도 다 기로소 회원이 될 순 없었습니다. 우선 과거급제를 통하지 않고 관리가 되면 아무리 학문이 높고 명망이 두터워도 원칙적으로 입소할 수 없었습니다. 무관 출신도 역시 자격을 얻지 못했답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덕(德)’이었습니다. <맹자> ‘공손추·하’는 “세상에서 존귀하게 여기는 세 가지가 벼슬(작·爵)과 나이(치·齒)와 덕(德)”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삼달존(三達尊·존귀한 조건 세 가지)’이라 하는데요. ‘정2품 문관(爵)’으로서 ‘70세 이상(齒)’이 된 이라도 ‘덕(德)’을 겸비하지 못한 이는 기로회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노인 대접 받겠다고 아우성친 임금 이렇게 ‘삼달존’의 원로대신만이 입소할 수 있는 기로소에 들어가겠다고 아우성친 임금이 두 분 있었습니다.

숙종(1661~1720·재위 1674~1720)과 그 아들인 영조(1694~1776·재위 1724~1776)입니다.

더욱이 이 두 분은 70세는커녕 60세도 안 된 59세(숙종), 심지어 51세(영조)에 기로소 입소를 강행했습니다.

숙종은 초대한 기로신 10명에게 다섯 잔씩 술을 마시도록 했다. 기로신들은 임금이 따라주는 술을 사양할 수 없어 만취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두 분은 임금 신분으로서 들어갈 필요가 없는 기로소 입소가 뭐가 그리 급했을까요.

1719년(숙종 45) 4월 18일이었습니다. 59세에 기로소에 입소한 숙종은 기로신 10명을 초청하여 기념잔치를 벌였습니다.

당시 숙종은 눈병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요. 그래도 “병든 몸이 궁전에 오르니… 여러 관리 모여 있고…. 이 연회는 본시 높이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가득한 술잔에 자주 손이 간들 어떠리”라는 어제시를 지었습니다.

숙종은 기로신들과 하루종일 어울리며 5차례에 걸쳐 다섯 잔씩 술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그날의 연회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제작한 것이 <기사계첩>(보물)입니다.

59세에 “노인 대접 받고 싶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처음 거론한 이는 여성군 이집(1668~1731·인조의 고손자)이었습니다.

이집은 1719년(숙종 45) 1월 10일 “어차피 올 연말이면 (춘추 60을 앞둔) 성상의 기로소 입소를 준비할 것인데,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을 냅니다. 이때 대리청정 중이었던 세자(경종 1688~1724·재위 1720~1724)가 반색했습니다.

“태조대왕께서도 60세에 기로소에 들어가셨단다. 성상(숙종)도 59세가 되셨으니 자식된 마음에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하지만 법과 절차에 따라 추진해야 했습니다. 곧 난제가 생겼습니다.

“‘태조가 60세에 기로소에 입소했다’는 내용을 <실록> 등 공식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는 보고가 올라온 겁니다.

조정은 지춘추 민진후(1659~1720) 등 춘추관 관리 2명을 실록이 보관된 강화 정족산 사고(史庫)에 급파했습니다.

민진후는 그러나 “두 사람이 <태조실 록> 첫권부터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출처를 확인할 수 없어 헛걸음했다”(<숙종실 록> 1719년 1월 22일)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면서 “근거와 출처가 없으니 차라리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양전(숙종과 중전)을 위한 잔칫상을 베푸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한마디로 관례도, 출처도 없는 군왕의 기로소 입소 행사 강행에 신중론을 개진한 겁니다. 이 말에 충격을 먹은 것일까요, 삐친 것일까요. 숙종은 “그래? 기록이 없다니 할 수 없지. 논의를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 무렵 <실록>을 읽으면 잘 짜인 각본 같습니다. 임금이 “야, 증거 없다잖아. 안 할래”라고 떼를 쓰자, 종친들이 상소문 릴레이를 펼치고…. 세자가 맞장구치고…. 급기야 연잉군 이금(영조) 등이 종신(宗臣·벼슬하는 종친)을 거느리고 나섭니다.

“실록에 없다고 갑자기 논의를 중단하다니요. 아니 될 말씀입니다. 국초에는 사관들이 더러 빠뜨리고 기록했을 겁니다.”

기로소에 입소한 숙종은 눈병에 걸린 중에도 어제시를 지어 하사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잉군 등은 갑자기 “선조 말년에 태조대왕의 고사를 뒤쫓아 기로소에 입소하려고 했다가 미처 시행하지 못했다”는 가짜뉴스까지 동원했습니다. 선조(1552~1608·재위 1567~1608)는 57세에 승하했거든요. 또 <선조실록>에도 “선조가 기로소 입소를 도모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세자와 왕자, 여러 종친이 한목소리로 청하고… 선조의 고사까지 전해진다니 명백한 일이 아니냐”면서 기로소 입소의 명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신하들이기로서니 더는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59세나 51세나 60 바라보는 건 매한가지 이 숙종의 기로소 입소 소동은 새 발의 피였습니다. 숙종의 아들인 영조는 51세에 기로소에 입소했으니까요.

영조는 “기로소에 입소한 뒤 국사를 원량(사도세자 1735~1762)에게 맡기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영조실록> 1743년 1월 11일)이라 했습니다. 종신들이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1744년(영조 20) 7월 29일 여은군 이매가 “전하의 춘추가 ‘50을 넘어 60을 바라보게 됐으니’ 기로소 입소 자격을 갖췄다”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51세=망육(望六·60을 바라보는 나이)’이라 하니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숙종은 59세였고 전하는 51세입니다. 조금 차이는 나지만 ‘육순을 바라보는 것은 매한가지(望六旬則一)’입니다.”

그런 억지춘향이 어디 있습니까. 영조는 그러나 “기로소 입소가 내 소원이기 때문에 겸손 떨지 않겠다”면서 “선조(숙종)의 고사를 따르려면 59세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몸이 아픈 내가) 어찌 될 줄 알겠느냐”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영조실록>은 이 대목에서 “영조의 하교가 누누이 수백 마디에 달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보다 못한 우의정 조현명(1690~1752)이 “성교(聖敎·임금의 지시)가 너무 장황하고 번거롭다”고 일침을 놓았답니다. 영의정 김재로(1682~1759)가 가세했습니다.

“태종·세종·세조·중종·선조 같은 분들은 50세를 넘겼지만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기다렸다가 의논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8월 11일)

59세에 기로소 입소를 추진하려던 계획은 실록 등에서 그 근거와 출처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의 목소리에 부딪혔다. 그러나 종신(벼슬에 나선 종친)들이 상소릴레이를 펼치고 급기야 왕자인 연잉군 이금(훗날 영조)까지 앞장서자 일사천리로 강행됐다.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는 평소 “기로소에 입소하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남들은 젊어 보이려고 흰 머리털 뽑는데… 정승들까지 앞장서서 반대하자 영조가 어린아이같이 생떼를 부립니다.

“자네들이 나를 아비라고 여긴다면 8년을 기다리라고 했겠느냐. 역시 아들이 아버지 생각하는 마음과 너희 같은 신하들이 임금 생각하는 건 다르구나.”(8월 19일)

이에 조현명이 일침을 놓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늙는 것을 싫어해 족집게로 흰 머리털을 뽑기까지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젊어 보이려 애쓰는데 임금이라는 분은 왜 저렇게 노인 대접을 받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어느 누가 임금의 고집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조현명 등은 “정 그러하시다면 특별 교서로 명하시면 불가하지 않겠다”면서 항복했습니다. 마침내 극심한 반대여론을 잠재웠다고 의기양양한 영조 앞에 새까만 관리가 나섰습니다.

사헌부 지평(정5품) 박성원(1697~1767)이었는데요(8월 29일). 박성원은 “성상께서는 100세까지 사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그리 급하시냐”고 꼬집은 거죠. 영조가 펄펄 뛰었습니다. “네가 감히 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반박하는가.”

영조는 ‘너 때문에 더러워서 임금 노릇 못해 먹겠다’는 듯 “모든 정사는 앞으로 승정원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명까지 내렸습니다. 결국 박성원은 영조의 역린을 건드린 죄로 절도(남해)에 유배됐습니다. 이 지경이니 누가 반대 목소리를 내겠습니까.

영조는 1744년(영조 20) 9월 9일 ‘60을 바라보는 나이(망육·望六)’라면서 기로소에 입소했습니다. 이때 입소를 기념해 제작한 계첩도 있습니다. 바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사경회첩>입니다.

초조했던 59세, 51세 임금 숙종·영조 부자는 왜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쓰면서까지 기로소 입소를 ‘소원’했을까요.

갖가지 해석이 나오지만 역시 건강문제를 들 수 있겠네요. 조선 임금들의 평균수명은 48세(한국나이) 정도였는데요.

27명 중 환갑을 넘긴 이는 태조(74), 정종(63), 광해군(67), 숙종(60), 영조(83), 고종(67) 등 6명입니다.

숙종의 경우 병치레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기로소에 입소하기 2년 전인 57세 때는 다리가 저리며 양쪽 눈이 어지럽고 잘 보이지 않는 증세에 시달렸습니다.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과연 숙종은 기로소에 입소한 직후 급격하게 쇠약해졌습니다. 1720년(숙종 46) 1월 예순을 맞이했는데요.

그 해가 마지막이 됐죠. 6월 8일 승하할 때까지 6개월 이상 병석에 누워 있었습니다. 숙종은 60을 맞이하기도 어려운 몸 상태를 알고 기로소 입소를 강행한 것 같습니다.

영조는 어떨까요. 83세까지 산 영조는 조선 임금 가운데 가장 장수한 왕이죠. 그러나 ‘골골 팔십’이라는 말이 꼭 맞았습니다.

특히 기로소에 입소할 무렵인 50세 때는 담증과 근육통, 어지럼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영조가 “선조(숙종)의 고사를 따르려면 59세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어찌 될 줄 알겠느냐”고 조바심을 낸 겁니다.

또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1670~1718)의 소생이었습니다. 출생 콤플렉스가 만만치 않았죠.

게다가 이복형(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평생 따라다녔습니다. 영조는 기로소에 입소한 부왕 숙종의 모습과 자신을 대비시키면서 왕권의 정통성을 입증하려 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두 임금이 59세, 51세에 기로소에 입소하겠다면서 생떼를 썼죠.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천근만근 국정의 무게를 짊어졌던 군주였으니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까요.

영조가 기로소에 입소한 기념으로 제작한 중 ‘영수각친림도’. 모든 반대를 묵살한 영조는 1744년 9월 9일 평소 소원하던 기로소에 입소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노인 대접 받는 법? 요즘 ‘노인 연령’ 문제가 반드시 풀어야 할 화두로 등장했는데요. 1981년 제정된 노인복지법 등에 따라 제도적으로 통용되는 ‘노인 연령 기준’은 만 65세입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고령화가 가속화하면서 그 기준을 늘려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죠.

2025년이 되면 5명 중 1명이 노인으로 분류된다면서요. 그럼 그런 노인들을 부양해야 할 젊은이들의 부담이 너무 커질 것 같네요. ‘정년 연장’ 문제도 함께 논의돼야 할 것 같고요.

저도 환갑이 넘은 지 몇 년 돼서 만 65세를 향해 가고 있는데요. 곧 ‘노인 대접’을 받게 됩니다.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낀 세대’라는 푸념도 해보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우리 자식들 부담이 너무 커지잖습니까.

무엇보다 ‘기로(60~70세)’에 접어든 분들은 옛사람들이 강조한 ‘삼달존’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나이’란 시간이 지나면 쌓이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벼슬(작·爵)’을 얻은 분들이나, 필자 같은 장삼이사라면 ‘덕(德)’이 필요하겠네요. ‘노인 대접’을 제대로 받으려면….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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