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신선하지도 올바르지도…'길복순'

손정빈 기자 2023. 4. 5.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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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변성현 감독은 배우 설경구를 되살렸다.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이전 설경구의 필모그래피는 지지부진했다. '나의 독재자' '서부전선' '루시드 드림'의 관객수는 각 38만명, 60만명, 10만명. 흥행 실패만큼 좋지 않았던 건 그가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지 못 했다는 점이었다. 설경구의 연기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마치 옛날 배우가 된 것 같았다. 그랬던 그가 변 감독의 '불한당'을 만나 다시 태어났다. 이 작품에서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고 멋진 표정을 짓는 설경구는 예전에 그 연기 잘하는 아저씨가 아니라 말 그대로 스타 배우가 돼 있었다. 말하자면 변 감독은 그에게 10년은 더 써먹을 수 있는 새로운 이미지를 선사했다.

이쯤되면 변 감독을 이른바 '배우 재발굴 전문가'로 불러도 될 것 같다. 변 감독은 이번엔 전도연에게 생기를 줬다. '너는 내 운명' '밀양' '하녀'로 이어지는 2000년대 필모그래피가 전도연 연기 경력의 정점이었다면, '무뢰한'을 빼면 인상적인 작품이 없었던 2010년대는 꽤나 긴 침체기였다. 설경구와 마찬가지로 전도연의 연기를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한국영화계에서 40대 여성 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극히 한정돼 있었다. 변 감독은 그런 전도연을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에서 보여준다. '길복순'은 전도연의 얼굴에 킬러의 냉혹과 엄마의 당혹을 함께 담아내며, 그간 이 뛰어난 배우를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던 다른 영화들을 핀잔하는 것 같다.


되도록이면 전도연을 무겁게 담아내려고 골몰했던 앞선 영화들과 달리 '길복순'은 전도연을 최대한 가볍게 소비한다. 전설로 불리는 최고의 킬러이지만 은퇴를 고민 중이라는 설정은 익숙하고, 은퇴 이유가 홀로 키우는 딸 때문이라는 건 상투적이다. 청부 살인을 업으로 하는 이들을 모아놓은 회사가 있으며 그들이 하는 일을 서로 작품이라고 부르는 건 어차피 유치하다. 변 감독이 깔아놓은 이 뻔한 판, 그러니까 뭘 해도 부담스럽지 않은 킬링타임용 영화에서 전도연은 오히려 더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게 된 듯하다. 전도연이 많은 장면에서 강도 높은 액션 연기를 직접 해내는 걸 보고 있으면 배우의 연기라는 건 결국 몸 전체를 사용해야만 하는 직업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극도로 섬세한 특유의 감정 표현은 명불허전이다. 액션스타가 된 '브랜드 뉴' 전도연은 경쾌하고 발랄하며, 액션물에서도 캐릭터의 인간미를 드러내 보이는 '빈티지' 전도연은 클래식하다.

다만 '길복순'은 전도연에겐 새로울지 몰라도 관객에겐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배우 전도연이라는 특정 프레임으로 볼 때 신선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전도연을 포함한 영화 전체를 보면 꽤나 시들하다. 가장 큰 문제는 '길복순'만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우선 이 영화는 큰 틀에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 시리즈와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의 '존 윅' 시리즈에 빚을 지고 있다. 킬러 회사라는 설정은 한국영화 '회사원'을 떠올리게 하고, 일부 시퀀스는 타란티노 감독의 다른 영화들 또는 '킹스맨' 시리즈의 일부 장면에서 가져온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보니 '길복순'은 영화를 1년에 한 두 편 보는 관객에게 새로울 수 있어도 굵직한 액션 영화를 꾸준히 따라온 관객에게는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변 감독의 이 시도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타란티노 감독이 '킬 빌' 시리즈를 만들 때 그가 좋아했던 일본 사무라이·야쿠자 영화, 홍콩 무술영화, 할리우드 B급 액션·호러 영화를 노골적으로 차용하고 오마주하며 완성한 것과 같은 방식이다. 다만 '킬 빌'이 수집하고 섞고 흔들며 그 작품만의 독창적인 스토리·캐릭터·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면, '길복순'은 '길복순'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이 영화를 흉내내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달 31일 공개되자마자 넷플릭스 영화 부문에서 시청 시간 3위에 올랐다는 것 자체로 이 작품의 임무를 완수했다고도 볼 수도 있겠지만, 변 감독이 현재 차세대 한국 영화감독 중 멋진 그림을 가장 잘 만들어내는 연출가라는 점에서 볼 땐 아쉬움을 느낄 시청자도 있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이라는 관점에서도 '길복순'은 겉핥기에 그친다. 남성들의 세계에서 군림하는 여성 킬러(길복순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프로 청부살인업자 중 유일한 여성이다)라는 점, 이 킬러가 싱글맘이라는 점, 어린 시절 남성에게 학대받았다는 점, 킬러의 딸을 동성애자로 설정한 점을 보면 '길복순'이 PC에 의미를 충분히 부여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변 감독의 전작 두 편에서 철저히 남성들의 세계를 그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성 길복순의 모성에 집착함으로써 여성 서사는 고사하고 오히려 PC에 반하는 영화가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길복순'은 PC를 하나의 트렌드 정도로 인식하고 도식화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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