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김용균 어머니 "비정규직 목숨값은 정규직의 절반이라니"

윤근영 2023. 4. 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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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미숙(53)은 김용균의 어머니다.

남편, 아들과 셋이어서 가끔 여행하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이제 노동 운동가가 됐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들이 죽은 지 4년이 지난 지금 산업현장에 갔다가 죽지 않고 돌아오는 사회, 비정규직이 설움을 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는 산업 현장에서는 비정규직의 몸값이 정규직의 절반으로 계산한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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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은 식당도 캐비닛도, 다니는 길 가로등도 다르다"
"국회의원들 비정규직에 관심없다, 자신과 자기 당만 생각"
"나라가 당신들 것이냐…높은 사람들, 국민보다 자기이익 챙겨"
연합뉴스와 인터뷰중인 김용균 어머니 김미숙 [촬영 이건희]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꽃을 봐도 기쁘지 않아요. 용균이가 살아 있을 때는 꽃을 보면 정말 이쁘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 자체를 즐겼고 감흥이 일었어요. 이제는 그러지 못합니다"

김용균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미숙(53)은 김용균의 어머니다. 남편, 아들과 셋이어서 가끔 여행하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이제 노동 운동가가 됐다. 전국을 다니며 산재 사망 노동자 유가족의 손을 잡아주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강연도 한다.

그의 아들 김용균은 2018년 12월11일 새벽 서부발전 컨베이어벨트 아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김용균의 나이는 24세였다. 발견 당시 김용균의 머리와 몸은 분리돼 있었다.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미숙은 하나뿐인 자식이 죽었다는 현실에 남편과 함께 영안실 복도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다.

지난달 31일 서울 금천구 김용균재단 사무실에서 김미숙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들이 죽은 지 4년이 지난 지금 산업현장에 갔다가 죽지 않고 돌아오는 사회, 비정규직이 설움을 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는 산업 현장에서는 비정규직의 몸값이 정규직의 절반으로 계산한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전태일이 1970년 분신하면서 외쳤던 것을 50년이 지난 지금 내가 다시 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라고 했다.

김용균 동상과 어머니 김미숙 [연합뉴스 자료사진]

-- 어떻게 지내나.

▲ 아무것도 좋은 게 없다. 용균이 죽은 뒤 2년간은 거의 남편과 말을 섞지 않았다. 질병으로 남편이 쓰러져서 용균이 4년제 대학을 안 갔고, 이것이 사고로 이어졌다는 원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 고향은 어디인가.

▲ 충북 영동이다. 영동의 심천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구미에 있는 상고를 다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다. 나는 1남 5녀중 차녀였는데, 남동생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집 앞 강가에서 낚시하다 물살에 휩쓸려 숨졌다. 언니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의 작은 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작은할아버지는 잘살았기에 언니를 공부시키려고 데려간 것이다. 그 바람에 둘째인 내가 맏이 역할을 했다.

-- 어린 시절 농사일을 많이 거들었나.

▲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생들을 봐야 했고, 부모님의 농사일도 도와줘야 했다. 학교 가기 전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마솥에 여물을 넣고 소죽(소밥)을 끓여줘야 했다. 주말에는 고추 따는 일도 거들었는데, 고추가 빨갛게 익으면 무서웠다. 한여름에 고추 따는 일은 정말로 힘든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상업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취업해서 열심히 부모님의 빚을 갚았다.

-- 부모님이 아들을 잃어서 많이 힘들었을 듯한데.

▲ 죽은 남동생은 맨 아래에서 두 번째였으니 사고가 났을 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자식을 잃어보니 그 고통은 형제를 잃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남동생이 죽었을 당시 부모님의 고통에 대해 내가 신경을 못 써준 것이 너무 죄송하다. 어머니는 2018년 3월에 돌아가셨고, 용균이는 12월에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환갑을 넘긴 지 얼마 안 돼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고혈압이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와 인터뷰중인 김미숙 [촬영 이건희]

--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바로 취업했나

▲ 구미에 있는 섬유공장에 취업했다. 이 공장에 다니던 동네 언니로부터 소개를 받았다. 몇 년간 이 회사에 다니다 결혼 후 그만뒀다. 남편은 섬유공장의 동료였다. 용균이 유치원 때부터는 시댁이 있는 경북 영천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용균이 초등학교 때까지 살았다. 영천으로 간 것은 소를 기르고 복숭아 농사를 지을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뜻대로 되지는 않아서 용균이 중학교 때 다시 구미로 이사를 왔다.

-- 남편의 몸이 안 좋아졌나.

▲ 구미로 나온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의사는 남편이 깨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했다. 깨어나더라도 뇌사 또는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그만 포기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심폐소생술을 계속해달라고 매달렸다. 남편은 이틀 후에 기적처럼 깨어났다. 남편은 그 이후에 일을 할 수 없었다. 나는 혼자 벌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 어떤 일을 했나.

▲ 구미의 작은 업체에서 회로기판(PCB) 불량 여부를 검사하는 일을 했다. PCB를 몇백 배로 확대해 컴퓨터로 체크하는 일이었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휴대전화 문자로 해고당하는 동료들을 보고는 경쟁력이 있어야 쫓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맡은 업무 외에 다른 일도 배워서 물량 상황에 따라 다른 분야에 배치될 수 있도록 했다. 다행히 나는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돈을 더 벌기 위해 노동시간 자체를 늘이기도 했다. 자발적으로 근무를 신청해서 한 달에 한 번만 쉬었고 한 달에 2주 연속 야간근무도 했다. 내가 홀로 가계를 책임지고 있다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이 50세를 넘긴 상태에서 눈이 나빠지면 이 검사일을 계속하기 어려우니 미리 돈을 벌어놔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어린시절 김용균과 어머니 김미숙 [본인 제공]

-- 용균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나.

▲ 병치레가 심했다. 감기에도 자주 걸렸다. 그래서 용균이한테 공부하라는 소리를 안 했다. 몸 건강하게 우리 곁에 있는 것이 부모가 바라는 것이라고 늘 이야기했다. 실제로 우리 부부는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공부 잘한다고 해서 돈 잘 버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용균이가 공부하고 있으면 남편은 가서 불 끄고 얼른 자라고 했다.

-- 그런데도 아들은 공부를 잘했나.

▲ 중학교 때는 성적이 중간밖에 안 됐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대학 가는 것이 걱정됐는지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고교 3학년 때는 반에서 1∼2등을 놓치지 않았다. 4년제 국립대에도 합격했지만, 취업 등을 생각해서 2년제 전문대에 진학했다. 전문대에 다니다 여의찮으면 4년제 대학에 편입할 생각도 있었다. 그때 염두에 뒀던 학교는 고려대였다. 우리 부부는 어떻게 우리 사이에서 저렇게 마음이 곱고 또래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아이가 나왔는지 신기하다는 대화를 나누곤 했다.

-- 용균이 취업은 쉽게 했나.

▲ 아들은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뒤 복학해서 1년을 더 다닌 다음에 취업을 시도했다. 1년간 학원에 다니며 자격증 5∼6개를 땄다. 그런데도 취업이 쉽지 않았다. 7개월 동안 전국을 다니며 원서를 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때 아들이 원서를 낸 곳은 주로 대기업이었다.

군인시절 김용균과 어머니 김미숙 [본인 제공]

-- 용균이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어떻게 일하게 됐나.

▲ 용균의 취업 목표는 한국전력이었다. 군대에 가서 본인이 전기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용균은 한전에 입사 원서를 냈지만 떨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김천의 한 업체 사무 정규직에 합격했다. 그런데 출근하라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사업확장을 할 계획이었으나 무산됐다고 했다. 우리는 괜찮은 회사를 소개해달라고 그 회사에 요청했고, 이를 계기로 용균이 가게 된 회사가 서부발전의 하청회사인 한국발전기술이었다. 아들은 그곳에서 경력을 쌓은 뒤 한전에 다시 지원할 계획이었다.

-- 그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는 알고 있었나.

▲ 발전소로만 알았다. 석탄을 취급하는지 몰랐다. 아들을 그곳에 보낼 때는 마음이 불편했다. 처음으로 아들과 떨어져 사는 것이었고 무엇을 하는 곳인지, 위험하지는 않은지 등을 몰랐기 때문이다.

-- 용균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인가.

▲ 용균이 쉬는 날 전화로 "엄마, 집에 갈까?"라고 묻곤 했다. 나는 오지 말라고 했다. 하루 쉬는데, 집에 오가다 보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야근하고 반나절, 그리고 그다음 날 쉬었다고 한다. 그걸 알았으면 집에 오라고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용균은 입사한 지 한 달 반 만에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 집에 왔다. 몸이 너무 많이 말라 있었다. 하는 일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힘들다고 했다. 그러면 그만두라고 했더니 아들은 조금 더 일해보고 안되면 포기하겠다고 했다. 워낙 취업이 어렵기에 그곳에서 좀 더 버텨보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대학 시절 김용균 [어머니 김미숙 제공]

-- 용균이 사고 소식은 어떻게 접했나.

▲ 용균이는 2018년 12월11일 새벽 숨진 채 발견됐다. 전날인 10일 용균이 밤 근무의 출근 시간 무렵인 오후 5∼6시께 용균이한테 전화했으나 받지 않았다. 오후 7시쯤에 다시 전화했더니 역시 반응이 없었다. 불안해진 나는 오후 9시 40분에 전화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때 암울한 느낌이 왔다. 무슨 사고가 날 것 같은 느낌, 사람이 죽기 전에 온다는 그런 느낌 같은 것이었다. 전화를 기다리다 나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다음 날 오전 6시에 남편이 나한테 뛰어왔다. 남편은 예민한 성격이어서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용균이 맞는지 확인하러 오라는 것이다. 그전에 남편 전화로 경찰의 문자메시지가 두차례 왔으나 남편은 확인하지 못했다. 남편은 빗소리가 나는 이어폰을 끼고 자곤 했으니 문자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곧바로 태안으로 달려갔나.

▲ 경찰은 전화상으로 용균의 상태에 대해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들이 크게 다쳤거나 의식을 잃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열차와 택시를 갈아타고 태안의료원에 도착해서 응급실로 뛰어갔다. 그곳에 용균이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안실에 가서 인상착의를 말했더니 청년 한명이 들어왔다고 했다. 영안실 직원이 서랍장을 열었고, 석탄 분진으로 얼굴이 까만 청년의 얼굴이 나왔다. 머리카락과 피부를 만져봤는데, 용균이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한 탓에 아들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태안경찰서로 가서 아들인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부모가 자식도 몰라보느냐면서 경찰이 언성을 높였다. 우리 부부는 다시 태안의료원으로 갔다. 서랍장 속 청년의 눈썹을 보고 피부, 머리카락을 만져보니 더 이상 아들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 그때는 아들의 머리가 몸과 분리된 사실을 몰랐나.

▲ 나는 용균의 손이나 몸을 만지려 했는데, 영안실 직원이 제지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목과 머리가 분리됐고, 부모가 그 모습을 보면 살아가기 힘드니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영안실 직원들은 우리 부부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때까지 아들이 죽었다는 것에 현실감이 없었는데, 영안실 밖으로 쫓겨나면서 현실임을 깨달았다. 우리 부부는 복도에서 뒹굴면서 통곡했다. 아들을 다시 보고 싶으니 보여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문을 잠가놓고 열어주지 않았다.

충남 태안에 있는 한국서부발전 본사 전경 [서부발전 제공]

-- 회사 측은 사고에 관해 설명했나.

▲ 울다 지쳐서 1층으로 올라왔는데 하청회사 사장과 이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죄송하다면서 '용균이가 착실했고 일도 잘했는데, 가지 말라는 곳에 가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해서 사고가 났다'고 했다. 처음에는 정신이 없어서 무슨 말인 줄 몰랐는데, 조금 지나서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우리 아들이 절대 그럴리가 없는데, 사장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는 용균이 동료들을 몰래 구석으로 데려가서 물어봤다. 비정규직들은 회사가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용균이 동료들은 말했다. 그때 나는 회사가 모든 책임을 용균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과 더 이상 이야기하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 사고 난 지 사흘 후에 현장을 방문했나.

▲ 왜 사고가 났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용균이 동료들에게 출근부터 퇴근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동선을 알려달라고 했다. 사고가 난 곳은 5층 건물의 맨 위층이었는데, 아파트 15층 높이였다. 여기저기 낙탄이 무덤처럼 쌓여있었고 분진이 많이 깔려 있었다. 용균이 회사가 맡은 곳은 9, 10호기였는데, 컨베이어벨트가 외함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안에 있는 낙탄을 꺼내려면 개구부를 통해 안을 들여다봐야 했다. 낙탄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떨어진 탄으로, 그대로 두면 벨트에 마찰이 생겨 화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용균이는 소음이 나는지, 타는 냄새가 있는지 확인하고 문제가 있는 곳을 휴대전화로 찍어 보고하고는 문제를 해결한 뒤에 다시 사진을 찍어 보냈다고 한다.

2018년 사고당시 태안화력 발전소내 낙탄과 분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 컨베이어벨트를 외함으로 씌운 이유는 무엇인가.

▲ 탄가루가 날리는 것을 막고, 일하는 사람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낙탄이 밑으로 빠지고 물로 씻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회사 측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그런 장치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개구부가 있는 곳에 회전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문제를 확인하려면 개구부 안으로 머리를 넣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사고가 나는 것이다.

-- 사고 현장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나.

▲ 사고 현장은 보존돼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폴리스 라인도 없었고, 물청소가 이뤄진 상태였다. 회사가 무언인가 감추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반드시 진실을 알아내겠다면서 그곳에서 악을 쓰고 울었다. 너무 억울해서 통곡했다. 우리는 아들을 차가운 영안실에 놔둔 상태에서 2개월간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2016년 5월 발생한 구의역 스크린도어 비정규직 김군 사망사고 현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 아들 용균이가 보고 싶을 때는 언제인가.

▲ 용균이가 떠난 지 4년이 조금 넘었다. 명절 때나 생일 때 특히 더 보고 싶다. 잠자기 전에 아들이 꿈에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실제로 꿈속에 용균이가 나온 적이 몇 번 있었다. 어린 용균이가 강에 있는데, 물살이 세서 내가 용균을 들어 올려 바위에 앉혀놓는 꿈이었다. 비슷한 꿈이 반복됐다.

-- 산재사고로 연간 2천여명이 죽는데, 김용균 사건이 부각된 이유는 무엇인가.

▲ 아마도 2016년 5월 구의역 김 군 사망사건이 터진 이후에 2년 만에 또다시 비정규직 청년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보고 시민들이 분노한 것 같다.

-- 김용균 재단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 아들이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부발전은 일간지에 게재한 사과문과 우리 가족과의 합의서에서 용균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명시했으나 그것은 사회적 압력으로 억지로 한 것이었다. 진정한 조사가 이뤄지기를 바랐다. 시민단체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줌마이지만 여러분이 도와준다면 재단을 만들 수 있겠다고 했다.

1970년 분신한 아들 전태일 영정을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 이소선 [연합뉴스 자료사진]

-- 이사장직을 맡은 이유는.

▲ 김용균 이름이 들어가는 재단의 이사장은 내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재단이 제대로 기반을 잡을 것으로 생각했다.

-- 노동운동을 했던 이소선 여사를 아는가.

▲ 나는 이소선 여사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줄 몰랐다. 기자들이 알려줘서 알았다. 원래 나는 평범한 주부였고 노동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아들의 사망 이후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전태일이 분신 사망한 지 5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똑같은 주장을 해야 하는 현실에 나는 힘들었다. 이소선 여사 평전도 읽어봤다.

-- 공부를 많이 하나.

▲ 노동, 산재 관련 책도 읽고, 법도 공부한다. 알아야 대응하고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유튜브로 공부도 한다.

2023년 2월 서부발전 사장에 무죄선고한 대전지법 앞에서 시위하는 김미숙 [연합뉴스 자료사진]

-- 한국의 산업현장은 얼마나 위험한가.

▲ 산업현장에서 한해에 2천여명이 산재로 죽는다. 이 정도면 전쟁이 일어난 것 같은 참사가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한국의 산재 사망률이 가장 높다. 건설 현장에서 그물망, 방지막 등을 제대로 설치해야 하는데, 비용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제대로 하지 않는다. 시멘트 규합도 규정대로 하지 않는다.

-- 산업현장 사고의 구체적인 사례들 든다면.

▲ 조선소에서는 규정상 불산(불화수소산) 다루는 일과 용접하는 일이 동시에 진행되면 안 된다. 불꽃이 튀면 화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조선소 현장에서는 공사 기간 단축 압박으로 각 하청회사가 동시에 작업을 했다. 결국 화재가 발생했고, 작업자는 소화기 있는 곳을 기억하고 찾아서는 부랴부랴 불을 껐다. 직후에 열린 조회에서 작업자는 불을 신속히 진화한 데 대해 칭찬을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회사 상사는 칭찬은커녕 앞으로 또 화재가 발생하면 징계하겠다고 했다. 불산과 용접 일이 동시에 한 공간에서 진행되는 것을 구조적으로 막을 생각은 없고, 책임을 떠넘기는 징계를 하겠다는 것이니,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 산업현장에서 안전장치를 소홀히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처벌이 약하기 때문이다. 용균이 사건의 원청 대표에게 법원은 무죄 판결을 했다. 원청사장이 위험성을 몰랐기 때문에 무죄라고 한다. CCTV를 통해 어떻게 일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데도 그런 판결이 나온다. 수원의 한 건설 현장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있는데, 법정 다툼이 있었다. 판사가 유족 앞에서 하는 말이 "이런 사고는 비일비재한데, 왜 이걸로 법정에서 싸우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보통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사회에 너무 많다.

-- 회사 측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안전에 대한 투자를 안 하나.

▲ 용균이 일했던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원청인 서부발전은 한국발전기술과 계약하면서 노임으로 월 550만원을 책정했다. 그런데 용균이가 받은 월급은 220만원이었다. 한국발전기술은 사업을 수주하면서 노임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계약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안전에 대해 투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점검 업무의 경우 2인 1조로 해야 하는 게 규정인데, 회사는 지키지 않았다.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헤드 랜턴도 지급하지 않아 휴대전화 플래시로 비추면서 일을 해야 했다.

차별 철폐를 외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정치권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있나.

▲ 그 사람들은 자기 당을 우선시한다. 자기가 재선돼야 하고, 자기 당이 살아야 하는 것을 중시한다. 개정 산업안전법은 도급 금지 대상에 발전소, 궤도산업 등을 제외했다.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 됐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경우 여당과 야당 모두 합심해서 당연히 원안으로 통과시킬 줄 알았는데, 50인 미만 사업장은 3년 유예, 5인 미만 사업장은 면제되는 것으로 통과됐다. 사람이 죽는 산재사고의 80%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어난다고 항변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 '나라가 자기들 것이냐'고 말했는데, 어떤 취지인가.

▲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등 힘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면서 국민들 이익보다는 자기들 이익을 챙기고 있다. 4년간 노동운동을 하면서 그런 걸 많이 느꼈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이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어느 정도 심한가.

▲ 용균이 다녔던 회사의 경우, 정규직이 다니는 길은 환했는데, 비정규직이 다니는 길은 가로등이 희미했다. 정규직 식당은 따로 있었고, 식사 내용물도 달랐다. 심지어 캐비닛 크기도 차이가 있었다. 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하청회사들에 페널티를 부과하는데, 정규직이 죽으면 4점, 비정규직이 죽으면 2점이다. 정규직 1명의 목숨값은 비정규직의 두배라는 의미다. 산재사고가 없으면 나라에서 세금혜택을 주는데, 서부발전은 5년간 20억원을 받았다. 위험한 일을 하청회사에 떠넘겨 노동자가 많이 죽어도, 원청에는 아무도 안 죽은 것처럼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받은 20억원은 원청 직원들이 성과금으로 나눠 갖는다.

연합뉴스와 인터뷰중인 김미숙 [이건희 촬영]

-- 본인의 성격은.

▲ 원래 내성적인데, 노동운동을 하면 보니 외향적으로 좀 바뀌는 것 같다. 나는 대체로 참고 지내지만, (심각성이) 한계에 이르면 이야기한다. 상대방이 아무리 높은 사람이어도 지적할 것은 지적한다.

-- 본인의 장단점은

▲ 장점은 끈기가 있고 생활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단점은 말주변이 없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나서는 것을 두려워했고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 앞으로 노동운동을 계속할 생각인가.

▲ 내가 노동운동을 하는 것은 이렇게는 이전 삶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4년간 보고 느낀 것이 있고, 알게 된 것이 많은데 어떻게 모른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 길이 쉽지는 않다. 자식 잃은 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야 하고, 그 사고를 되새김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런 운동을 할지 확답하기 어렵다. 다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청년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청년들이 우리 세대보다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데, 기성세대들이 모두 망쳐 놓은 것 같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좋겠다.

(취재지원 이건희 인턴기자)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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