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건국대통령 적힌 父 이승만 묘비, 땅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김은중 기자 2023. 4. 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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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子 이인수 부부 인터뷰
“1992년 세운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묘비
DJ정권 들어서자 당시 여권이 반대
너무 억울해 땅에라도 묻자고 했다
올해 추모식 땐 세상 나왔으면...
나폴레옹 재평가도 200년 걸려”

“1998년 ‘건국 대통령 내외분의 묘’라 적힌 묘석(墓石)을 아버님 옆에 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땅속에 묻힌 묘비가 이제 다시 세상으로 나와 햇볕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92·오른쪽)씨와 아내 조혜자(81)씨가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이화장(梨花莊)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씨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건국 대통령 내외분의 묘’라 적힌 묘석(墓石)을 (정치적 이유로) 아버님 옆에 묻을 수밖에 없다”며 “그때 땅속에 묻힌 묘비가 이제 다시 세상으로 나와 햇볕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이태경기자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이화장(梨花莊)에서 만난 이인수(92)·조혜자(81)씨 내외는 본지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씨는 1961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養子)로 입적됐고, 부부는 이 전 대통령 서거 후 약 50년 넘게 사저인 이화장을 지켰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국가보훈처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등 여권을 중심으로 이 전 대통령 공(功)을 재평가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당사자인 가족들도 그간의 서운함에 입을 뗀 것이다.

현재 서울 국립현충원에 있는 이 전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 묘지 앞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내외분의 묘’라 적힌 비석이 서 있다. 묘비문은 서예가인 송천(松泉) 정하건 선생이 썼다. 조씨는 “1992년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합장을 하면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라 새긴 묘석을 세웠는데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당시 여권이 반대해 땅에 묻어야 했다”며 “조심스럽지만 오는 7월 19일 있을 58주기 추모식 땐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당시 대한민국의 적통을 1948년 8월 15일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에서 찾으려는 정치권 일각에서 ‘건국’이란 표현을 문제 삼으면서 ‘초대’로 수정했다고 한다. 이를 억울하게 여긴 이씨가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묘석을 땅에라도 묻자”고 했다.

2012년 7월 19일 서울 동작구 현충원 이승만 대통령 묘역에서 비문을 쓴 정하건 선생이 묘석을 바라보고 있다. 묘석에는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내외분의 묘"라고 써있다./ 조선일보 DB

최근 여권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 수립,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농지 개혁 등 이 전 대통령의 공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윤 대통령도 비공개 회의에서 종종 이 전 대통령에 대해 “역사적으로 너무 저평가돼 있다” “과오가 있더라도 공에 대한 평가도 같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보훈처가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위한 기초 작업에 나서 곧 부지를 선정할 예정이다. 또 지난달 26일 이화장에서 열린 이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 때는 박민식 보훈처장, 박진 외교부 장관,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 등 장관급 인사가 셋이나 참석해 화제가 됐다.

부부는 “기념관 건립 소식을 듣고 정말로 기뻤다”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씨는 “이 전 대통령이 광범위한 유엔 외교를 펼쳐 1948년 12월 ‘신생국 코리아’가 국제 무대서 어엿한 나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며 “과거엔 이를 기념하는 ‘유엔 데이’도 국경일로 존재했는데, 이런 이 전 대통령의 노력을 젊은 사람들이 꼭 알아줬으면 한다”고 했다.

1961년 하와이에서 -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가 1961년 12월 13일 미국 하와이 자택 테라스에서 양아들 이인수(가운데)씨를 맞이하고 있다.

좌파 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했지만 거짓으로 판명 난 ‘백년 전쟁’ 등 그간 좌파 진영을 중심으로 이 전 대통령의 과거사에 대한 왜곡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엔 박삼득 당시 보훈처장이 이 전 대통령을 ‘이승만 박사’라 칭해 폄훼 논란이 일었다. 조씨는 “어머님(프란체스카 여사)께서 생전에 ‘나폴레옹도 다시 평가하는데 200년이 걸렸는데 우리 국민은 훨씬 더 똑똑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공로를 알아줄 것’이라 말해 왔다”고 했다.

부부는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한미동맹과 이달 말 예정된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訪美)에 대해서도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씨는 “지금 동양에서 한국과 미국만큼 소중한 동맹이 없다”며 “혈맹이 앞으로도 세계 평화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회담에서 좋은 결과를 내서 동맹의 다음 100년을 도모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 등으로 최근 몇년간 갈등을 빚은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이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면 다시 우리와 가까워질 수 있다”며 “떨어질 수 없는 이웃 국가니 상부상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인수(92·오른쪽)씨와 아내 조혜자(81)씨가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이화장(梨花莊)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이 전 대통령은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기에 앞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 대통령과 서한을 주고받았다. “세계 침략자들을 억지하는 것은 말이 아닌 행동”이라면서 때로는 미 대통령을 압박하며 조약 체결을 이끌어내 7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동맹의 법적 기반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씨는 “전쟁의 참화에 직면한 약소국 대통령이 끈질긴 협상을 할 수 있었던 건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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