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 향기 반곡지… 원효·설총·일연 삼성현 고을의 봄 [자박자박 소읍탐방]
경북 경산은 전형적인 도농복합도시다. 대구의 위성도시로 곳곳에 크고 작은 공단이 들어섰고, 대학도 10개나 된다. 대구에 있다고 생각하는 대학이 사실은 대부분 경산에 소재한다. 팔공산 아래 비교적 평탄한 지형이라 산수가 빼어나다고 보기는 힘들어도 봄 한철은 어느 지역 못지않게 화사하고 눈부시다. 낮은 언덕과 드넓은 들판이 온통 분홍빛이다. 자두와 복숭아가 시차를 두고 농도를 달리하며 꽃을 피운다.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로 차를 모는 것만으로 황홀한 봄 기운에 넋이 나갈 지경이다.
300개 넘는 저수지 그중에 반곡지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하니 마음이 바빠진다. 초여름 날씨에 예년보다 일찍 봄꽃이 핀 탓에 축제를 준비하는 지자체나 꽃놀이 가려던 여행객이나 갈피를 잡기 힘들다. 경산도 8일 ‘복사꽃길 걷기’ 행사를 준비 중인데, 지난주 이미 화사하게 만개했으니 정작 행사가 열릴 때는 끝물이 될 듯하다.
이맘때 경산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은 남산면 반곡지다. 제방 높이 6m, 길이 139m에 불과한 자그마한 저수지다. 그 제방에 수령 300년 된 버드나무 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수면에 비친 모습이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뤄 동화 같은 풍경을 빚는다. 물오른 가지마다 파릇파릇 연둣빛 이파리가 돋아나고, 일부 가지는 물속에 잠길 정도로 늘어졌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면 현실과 반영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여기에 저수지 주변 산자락이 온통 복숭아밭이라 동요 ‘고향의 봄’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고향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울긋불긋한 꽃 대궐로 묘사된다. 반곡지 주변에선 연분홍에서 진분홍까지 농도를 달리하는 복숭아꽃이 하도 눈이 부셔 다른 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을 뒤편 산자락으로 눈길을 돌리면 제멋대로 뿌리내린 산벚꽃이 또 하얗게 봄날을 밝히고 있다. 복사꽃이 시들면 반곡지의 동화 같은 풍광도 조금은 퇴색되겠지만, 버들가지의 푸르름은 날로 더해갈 테니 한철 눈요깃거리가 아니라 사계절 매력적인 곳이다.
반곡지는 1903년 축조됐다. 마을 이름인 반곡리에서 유래된 명칭인데, 반곡리가 외반리와 내반리로 나뉘어 있을 당시엔 외반지라 불렀다. 저수지 아랫마을이 외반마을, 윗마을이 내반마을이었다.
경산에는 반곡지처럼 크고 작은 저수지가 300개가량 있다.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적은 지역이라 오래전부터 농업용수와 생활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저수지를 축조하고 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각각의 저수지마다 지역민의 삶의 궤적을 반영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압량읍의 마위지는 신라 김유신 장군과 관련이 깊다. 김유신이 압량주 군주(軍主)로 부임해 기마 훈련장을 조성한 후, 말에게 물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낙들이 출정하는 남편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말의 귀를 씻었다고 해서 ‘마이지(馬耳池)’라 불렀다고도 한다. 현재는 주택단지에 둘러싸인 연못 주위로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도로변에는 말을 타고 달리는 김유신 장군과 뒤따르는 병사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훈련장은 마위지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 있다. 인공으로 쌓은 토성 위에 아무런 시설물 없이 둥그런 공터로 남아 있는데, 주변이 온통 공장과 창고로 둘러싸여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경산병영유적’이라는 안내판이 무색할 지경이다.
문천지 다음으로 넓은 남매지는 경산시청 바로 앞에 위치해 시민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연못가로 벚나무와 개나리가 산뜻한 봄 빛깔을 뽐내고, 저수지 위로 연꽃봉오리를 형상화한 산책로가 놓여 있다. 남매지에는 가난을 벗어나려 글공부를 하는 오빠와 식모살이로 이를 뒷받침하려던 여동생이 부잣집 아들의 농락에 결국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는 오누이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전설과 상관없이 물빛과 꽃 색은 산뜻하기만 하다.
해골물 마신 원효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반곡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이 있다. 경산에 뿌리를 둔 원효·설총·일연 세 성현(三聖賢)의 역사 문화적 업적과 정신을 계승하자는 의미에서 조성한 시민공원이다. 원효(617~686)와 일연(1206~1289)은 경산이 고향이고, 설총(655~?)은 원효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지역의 성현으로 올려놓았다. 2015년 개장해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에 대기업 삼성과 관련이 있는 시설로 오해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시골에 이렇게 큰 공원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넓은데, 의외로 이용객이 많은 편이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벚나무와 자두나무 가로수길이 길게 이어지고, 주변 잔디밭에는 그늘 쉼터가 조성돼 있다. 화사한 꽃그늘 아래서 음식 보따리를 펴놓고 봄소풍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 물론 불을 피워 조리하는 행위는 금지돼 있다.
미로정원과 이야기정원, 바닥분수, 야외공연장 등을 통과하면 현대식으로 지은 대형 기와집이 나온다. 삼성현역사문화관이다. 1층은 특별전시장, 2층은 세 성현의 업적을 정리해 놓은 상설전시장이다. 학창 시절 시험이 끝나면 새까맣게 잊어버린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가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가장 먼저 신라의 승려 원효 전시실. 일심 (一心), 무애(無㝵), 화쟁(和諍)으로 대표되는 그의 중심 사상을 도표와 그래픽, 영상 등으로 전시하고 있다. “마음이 생김에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함에 감로수와 해골물이 둘이 아니구나.”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해골바가지에 든 물을 마신 후 돌연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왔다는 일화를 전시실 외에 야외공원 조각, 3D체험실 등으로 두루 알리고 있다.
길동무였던 의상과 비교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불교계의 큰 스승인 둘이 창건했다는 사찰이 전국에 각 70여 개나 된다. 의상이 세운 절은 화엄사 낙산사 부석사 해인사 등 이름난 곳이 많은데 비해, 원효가 세운 절은 여수의 향일암, 영동의 반야사 정도가 겨우 알려져 있다. 의상이 당에서 화엄종을 익혀 신라에 맞게 설파하였다면, 원효는 독자적인 깨달음으로 당시 민중의 마음을 어루만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라 시대 학자 설총 전시관은 그의 탄생 일화와 이두에 관한 전시로 채워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태종무열왕만이 원효가 부른 노래의 뜻을 알아듣고 관리를 보냈다고 한다. 경주 문천교에서 그 관리를 본 원효는 스스로 물에 빠졌고, 이후 요석궁으로 안내돼 요석공주와 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다.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기록한 이두 표기는 설총의 큰 업적으로 꼽힌다. 꽃을 의인화해, 아첨하는 장미와 충성으로 간하는 백두옹(할미꽃) 사이에서 고민하는 왕을 꾸짖는 ‘화왕계’도 그의 대표작이다.
고려 승려 일연 전시관은 삼국유사로 가득 채워져 있다. 단군·기자조선부터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다. 불교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와 신화·전설 등이 많이 수록돼 사서로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평도 있지만, 삼국사기와 함께 대표적 고대 역사서로 인식되고 있다. 전시관은 삼국유사에 수록된 다양한 이야기를 영상과 자료로 설명하고 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완성한 곳은 군위 인각사다. 군위군이 인각사가 위치한 곳의 행정 지명을 ‘삼국유사면’으로 고치고 대대적으로 알리고 있으니 경산시가 조금은 머쓱해졌다. 전시관을 나와 다시 산책로를 따라가면 낮은 언덕 위의 전망대 겸 정자에 닿는다. 벚꽃잎이 휘날리는 언덕에서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공원 바로 옆에 ‘경산동의한방촌’이 있다. 대구한의대에서 운영하는 시설로 약초전시실과 한방진료실, 족욕과 미용 및 한약재 체험실을 갖추고 있다. 여행객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대개 식사 때문이다. 1만 원으로 정성 가득한 ‘약선건강뷔페’를 즐길 수 있다.
삼성현문화역사공원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자인면 소재지로 이동하면 원효가 태어난 곳이라는 제석사가 있다. 일주문에는 자인의 영산인 ‘도천산 제석사’라 적혀 있지만, 실상은 주택가 한가운데에 위치한 조그마한 사찰이다. 원효가 출가한 뒤 자신이 태어난 곳에 지은 절로, 처음 이름은 사라사였다. 석가모니가 열반할 때 사방에 한 쌍씩 서 있었던 사라수(沙羅樹) 나무에서 비롯한 명칭이다. 대웅전 옆에 다른 사찰에는 없는 ‘원효성사전’이 있다. 자인면에서 매년 단오절에 대대적으로 제를 올리는 곳이다.
독립된 현이었던 자인은 지금도 지역 문화의 구심점이라 자부한다. 면 소재지 어귀의 ‘자인계정숲’에 그 자긍심이 응축돼 있다. 계정숲은 인공조림이 아니라 평지 구릉에 형성된 천연림이다. 최고 수령 250년으로 추정되는 이팝나무, 굴참나무, 말채나무, 느티나무 등 500여 그루의 나무로 울창하다.
입구로 들어서면 자인현을 거쳐간 관리에게 헌정하는 수십 기의 선정비와 공덕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숲 중앙은 ‘한장군의 묘’라는 비석과 함께 거대한 무덤이 자리 잡았다. 한장군은 어느 장군, 큰 장군, 한씨 성을 가진 장군 등 여러 의미로 해석된다. 신라(혹은 고려) 시대에 누이동생과 함께 화관을 쓰고 춤을 추며 왜군을 유인해 전멸시켰다는 설화 속 인물이다. 매년 단오에 마을에서 한장군놀이가 벌어지는데, 이때 오누이가 추던 ‘여원무(女圓舞)’ 공연도 열린다. 묘 옆에는 한장군 사당과 자인현청의 본관인 시중당을 복원해 놓았다. 전설 속 인물이지만 주민들 마음속에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실재한 인물이다.
경산=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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