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근로시간도 ‘네고’가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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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5일자 한국일보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기사가 실렸다.
사실은 당시 기자실에서 밤늦도록 이 기사를 썼다.
근로조건 중에선 급여가 제일로 중하지만, 근로자의 신체ㆍ정신 건강을 해치지 않는 적정한 근로시간도 좋은 직장 여부를 가르는 요소다.
휴식, 자기계발, 가족과 누리는 소중한 시간, 비호감 상사를 오래 보지 않을 권리와 직결되는 근로시간도 바로 그런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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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하루 6시간 일한다. 정찬 전 3시간, 정찬 후 3시간이다.”(1516년 출간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2016년 10월 15일자 한국일보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기사가 실렸다. 외국에서 도입된 주 4일제의 경험 및 국내 적용 가능성을 다룬 기사였다. 500년 전 영국 정치가가 묘사한 이상국가 사례에서 보듯, 짧은 근로시간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오랫동안 꿈꿔 온 지향점이다.
사실은 당시 기자실에서 밤늦도록 이 기사를 썼다. 근로시간 단축 기사를 근로시간 이후에 쓰고 있다는 모순이 우스웠지만, 앞으로 나와 동료들, 그리고 길게는 우리 아이들이 누리게 될 삶은 지금보단 나아질 것이란 기대가 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7년이 지난 지금도 이 나라에선 '남의 쉼'을 낮잡아 보거나 ‘타인의 야근’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가 여전하다.
근로조건 중에선 급여가 제일로 중하지만, 근로자의 신체ㆍ정신 건강을 해치지 않는 적정한 근로시간도 좋은 직장 여부를 가르는 요소다. 역사적으로 근로시간은 감소하는 쪽으로 단방향 변화를 거듭했다. 내리면 다시 오르지 않는 특성은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짧은 근로시간을 바람직한 목표로 여긴다는 걸 의미한다. 근로시간의 지속적 단축은 한 나라 국민이 누리는 삶의 질이 계속 나아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지표다.
그런 의미에서, 근로조건 후퇴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한 주 69시간 근로제 도입을 느닷없이 어젠다로 띄웠다는 사실부터가 정부의 패착이었다. 전쟁, 대재난, 경제공황 같은 국가적 위기가 닥친 상황도 아닌데,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로 근로조건이 뒷걸음질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수 국민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69시간 논란 이후 부진한 정권 지지율은, 침범받지 않아야 할 소중한 가치를 갑자기 침해당한 데 따른 원초적 반감의 표출이다.
‘월급명세서’만큼이나 소중한 ‘퇴근시간’ 문제를 다룸에 있어, 경박했던 접근 방식 역시 실망감을 줬다. 장관이 69시간을 말하다 안 통하니, 여당은 이걸 다시 64시간으로 내려 잡았고, 그러다 대통령실이 60시간을 언급했다. 노동개혁이 사회적 당위성이나 당사자의 공감에 기반하지 않고 ‘저게 싫으면 이 정도는 어때?’라는 식의 흥정판으로 변질되자 사람들은 열을 받았다.
이 문제를 경제 살리기로 보는 정부 입장도 이해 가는 측면은 있다. 산업계의 꾸준한 요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값어치 중에선 ‘네고’(흥정)가 불가능한 게 분명히 있다. 휴식, 자기계발, 가족과 누리는 소중한 시간, 비호감 상사를 오래 보지 않을 권리와 직결되는 근로시간도 바로 그런 예다.
노동정책이 특히 어렵고 시끄러운 건 ‘남의 밥그릇’을 다루는 일이어서다. 공정한 분배구조를 위협하는 탄탄한 밥그릇을 정리하는 일도 때론 필요하지만, 그런 철밥통 깨기마저도 해당 직종에 대한 끈질긴 설득과 폭넓은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번 69시간 논란에선 근로조건 개편 당사자인 국민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앞으로 정부는 △노동 △연금 △교육 등 분야에서 ‘과감한 구조개혁’을 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남은 개혁도 ‘69시간’과 같은 식이라면, 매번 지금 같은 저항과 냉소를 피해 갈 수 없을 거다. 개혁은 신중함과 예의, 그리고 남의 밥그릇에 대한 존중 어린 태도에서 출발하는 게 맞다. 흥정의 여지가 없는 정찰제 가격을 기어코 후려치려고 덤비는 손님은 어딜 가도 좋은 대접을 받기 어렵다.
이영창 산업2부장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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