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봄밤의 月池
봄꽃의 향연이 한창이다. 아마도 이즈음 아니었을까? 온갖 꽃이 만발해 어여쁨을 자랑하고 100종이 넘는 신비한 새와 진귀한 동물들이 각자의 소리로 봄을 만끽하고 있을 이맘때의 어느 봄밤 말이다. 꽃 내음과 따스한 봄기운에 취한 사람들이 한껏 멋을 부리고 신라의 동궁에 있는 월지(月池)로 모여든다.
화려한 궁궐 건축과 정원 주변을 밝히는 큰 화롯불, 등잔 수백 개가 빛을 발하면 월지의 넓은 연못에도 똑같이 화려한 불빛에 휩싸인 전각과 나무와 꽃들이 수면에 비친다. 여기에 유난히 밝은 달도 함께 월지 수면에 떠오른다. 연회가 시작되고 여흥이 무르익으면 등장하는 것이 있다. 14면이 모서리 지게 나무를 깎아 만든 주령구(酒令具)가 그 주인공이다.
언뜻 주사위와 비슷해 보이는 각 면에는 사자성어처럼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 번에 술 석 잔 마시기(三盞一去),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自唱自飮), 술 다 마시고 크게 웃기(飮盡大笑), 소리 없이 춤추기(禁聲作舞), 얼굴 간지럽혀도 가만히 있기(弄面孔過)” 등 주령구를 굴려 나오는 글귀대로 따라 해야 했다. 감미로운 꽃향기와 술과 흥에 취해 얼굴이 발그스레 달아오른 신라인의 밝은 웃음소리와 익살스러운 표정이 그려진다. 이 솔방울만 한 주령구는 흥을 돋우기에 꼭 필요한 연회 도구였을 것이다.
1975년부터 2년간 진행한 발굴 조사로 월지의 건물 터와 연못 속에서 유물 3만3000여 점이 출토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동궁과 월지를 돌고 걸어서 10분이면 닿는 곳이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검은 벽돌로 단아하게 지은 월지관은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한 유물 1000여 점을 전시해 놓았다. 볼 것이 가득한 경주박물관에서 자칫 월지관을 놓치기 쉽다. 그곳에 가면 주령구도 있고 아마도 술 저장 용도였을, 나보다 큰 독 항아리도 볼 수 있다. 마치 어젯밤 연회가 막 끝나고 불을 껐을 듯 그을음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등잔도 수십 개 있다. 그 먼 천년 전 신라인이 봄밤을 즐겼듯이 지금 우리도 그들처럼 밤의 월지를 더 즐긴다. 그 순간만큼은 신라인과 함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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