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 숫자에 갇힌 노동개혁

기자 2023. 4. 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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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아무도 일주일에 40시간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50시간 일하면 좋은 주입니다. 60~65시간 일하는 게 더 일반적입니다.” 미국의 한 경영학자가 1600명의 관리자와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92%는 일주일에 50시간 이상 근무하고, 3분의 1은 심지어 65시간 이상 일한다. 일하는 시간 이외에 자신의 작업을 준비하거나 모니터링하는 20~25시간을 반영하면 실제의 근로시간은 훨씬 더 늘어난다. “전문가란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자신의 경력에 바치는 사람”이라는 어느 경제학자의 정의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일에 미쳐 사는 것처럼 보인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오늘날 세계를 선도하는 과학과 기술이 탄생하고 벤처기업이 우후죽순처럼 성장하는 실리콘밸리에서는 사람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일한다. 실리콘밸리에서 5년 이상을 보내면서 기술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과 심층 인터뷰를 수행한 캐럴린 첸(Carolyn Chen) 교수는 “노동이 실리콘밸리에서 종교가 되었다”고 말한다. <노동 기도 코드>라는 저서의 부제이기도 한 이 명제가 말해주는 것처럼 실리콘밸리는 가장 종교적인 장소라는 것이다. 서류상 실리콘밸리는 미국에서 종교가 가장 적은 곳 중 하나이다. 한데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른 미국인들보다 종교가 없거나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곳은 미국에서 가장 종교적인 장소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일 자체가 종교가 된 이곳에서 사람들은 직장에서 영혼을 팔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직장에서 일하면서 영혼을 찾는다.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압축 성장을 한 우리에게 실리콘밸리는 언제나 모델이고 이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윤석열 정부는 노동개혁을 본격화하면서 태양이 작열하는 실리콘밸리를 모델로 삼은 것처럼 보인다. 노동시간 유연화를 노동개혁의 핵심으로 설정한 정부는 연장근로 단위 기간을 탄력적으로 확대하여 현재 ‘주 52시간’을 ‘주 최대 69시간’으로 늘린다는 것이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 중 하나인데 주 52시간에서 69시간으로 확대한다고 하니 우리는 분명 실리콘밸리보다 더 일에 미친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미친 듯이 일하면 우리나라 전체가 실리콘밸리가 된다는 환상에 빠진 것은 아닐까?

노동시간 확대 논의에 자괴감

노동시간의 유연성과 탄력성을 확대하는 게 노동개혁의 올바른 방향일 수 있다. 산업 및 근로의 성격에 따라 노동이 집중적으로 요구되는 시간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일할 때 몰아서 일하고 나중에 더 오래 쉰다는 말이 언뜻 매력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2주만 빡세게 일하고 나머지 2주는 쉴 수 있다면, 근로자 대부분은 아마 이런 모델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휴가는커녕 연차도 쓰기 힘든 근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탁상공론 수준의 결정이다. 정부가 염두에 뒀다고 하는 노동 약자, 특히 MZ세대의 반발이 이어지자 윤석열 대통령은 “주당 60시간 이상 근무는 건강 보호 차원에서 무리”라는 생각을 밝혔다. 연장근로 시간의 탄력적 운용이 왜 필요한지에 관한 방향을 잃어버린 노동개혁은 이제 52시간, 69시간, 60시간 등 숫자의 덫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노동개혁은 근로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범위에서 유연성과 생산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전임 정부가 도입한 주당 근로시간 52시간제가 노동 현장과 근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이념적인 이유에서 급격하게 시행된 점이 없지 않다면, 현 정부는 유연성 확대라는 명분으로 구체적 현실을 왜곡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주 52시간 제도는 왜 문제가 있는 것인지, 목표는 올바른데 현실 적용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논의 없이 근로시간만 69시간으로 확대하는 것은 정당하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다.

첫째, 연장근로 시간의 확대로 인한 초과 근무는 근로자의 건강권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대규모 연구에 따르면 직업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요인은 미세먼지와 같은 위해 물질이나 대형 공장의 기계가 아니라 ‘초과 근무’이다. 매년 74만5000명이 과로로 사망한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의 연구팀이 주 35~40시간 일하는 그룹, 41~48시간 일하는 그룹, 49~54시간 일하는 그룹과 마지막으로 55시간 이상 일하는 그룹의 심장마비와 뇌졸중 위험을 비교하였더니 ‘주당 55시간 이상’ 근무하는 그룹에서 그 수가 정말 급증했다고 한다.

주 55시간 이상은 건강과 생명에 치명적인데도 이를 확대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2021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실노동시간은 연간 1915시간으로 OECD 평균(1716시간)보다 199시간이나 길었다.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독일(1349시간)보다 566시간이나 길다. 노동시간에 관한 한 한국은 그야말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도 독일은 35.3시간으로 유럽연합(EU) 평균(37.4시간)보다 짧다. 그리스조차도 2021년에 평균 41.3시간이었는데, 69시간을 논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정말 자괴감이 들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 52시간제는 보완을 하더라도 가능한 한 유지되어야 한다.

둘째, 연장근로 시간의 확대는 노동약자의 근로조건을 더욱 악화한다. 전임 정부가 도입한 주 52시간제의 가장 커다란 혜택을 받은 집단은 두말할 나위 없이 대기업 직원들이다. 노조의 압력과 정부의 감독 덕택에 대기업 근로자들은 소위 말하는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주위의 눈치를 덜 보는 MZ세대의 등장으로 정시 퇴근이 가능해졌고, 휴가를 자유롭게 쓰는 경향이 서서히 정착되었다.

노동개혁의 방향과 본질 되짚어야

노동약자는 자신의 권리를 대변하는 사회적 제도로부터 소외된 집단을 말한다. 연장근로 시간을 69시간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는 직군의 노동자들은 대체로 노동약자에 속한다. 근로기준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어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이론적으로 52시간을 초과해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근로자들은 사실 이미 제도적으로 보호받고 있는 집단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법이 항상 준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소기업의 근로자들은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측의 일방적인 강요를 뿌리칠 방법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열악한 자영업자나 임시직 노동자처럼 불안정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어떤 사람은 2~3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다. 이 사람들은 재정적 이유로 근로시간을 줄일 방법이 없는 집단이다. 이러한 조건을 바꾸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과제이다.

셋째, 근로시간 연장은 오히려 생산성과 창의성을 저하시킨다. 한국이 대표적인 증거이다. OECD가 집계한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2021년 기준 시간당 42.9달러였다. 다른 주요국(G5)은 미국 74.8달러, 독일 68.3달러, 프랑스 66.7달러, 영국 59.1달러, 일본 47.3달러였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미국의 57.4%, 독일의 62.8%에 불과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짧게 일하는 독일의 노동생산성은 세계에서 가장 길게 일하는 우리보다 훨씬 높다.

매우 긴 근무시간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이 이제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기업의 많은 관리자는 더 오래 일하면 더 많이 생산한다는 구시대적인 생각에 여전히 갇혀 있다. 별을 보고 출근했다가 별을 보고 퇴근하는 데 익숙한 구세대의 자기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설문 조사에 따르면 ‘주 40시간’ 이상은 특별히 생산적이지 않다.

오래 일하는 것은 심장과 뇌 건강에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창의성과 혁신 역량도 떨어트린다. 오래 일하는 것은 이제 문화적으로 지켜야 할 좋은 전통도 아니고 더 이상 자랑스러워할 것도 아니다. ‘과로사’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도, 정의로운 사회도 아니다. 짧게 일하면서도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근로의 모델을 창출하고 개발하는 것이 새로운 사회적 과제이다. 우리는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었을 때 실현될 미래사회의 모습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이 모습은 결코 ‘69시간인가 아니면 60시간인가’의 숫자놀음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노동개혁의 방향과 본질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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