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인천에서 장로교가 감리교보다 60년 늦은 이유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3. 4. 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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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총, 인천-강화 기독교 역사 순례 1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조선 도착을 기념해 인천항에 세워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왼쪽부터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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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탑 가운데에 동상 보이시죠? 동상에 몇 사람이 보이시나요? 힌트는, 유치원생들은 이 문제 정답을 쉽게 맞춘다는 겁니다.”

임신한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부활절날 인천 도착

3일 낮 인천광역시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앞. 기념탑교회 박철호 목사가 퀴즈를 냈습니다. ‘기념탑’은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1986년 세운 조형물입니다. 1885년 4월 5일은 그해의 부활절이었답니다(올해 부활절은 4월 9일입니다). 세 줄기 돌로 이뤄진 기념탑 중앙엔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 등 3명의 모습이 새겨진 동상이 있습니다. 조선에 첫 선교사로 도착한 감격의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아펜젤러 부인은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아펜젤러 선교사는 조선을 향해 손을 뻗고, 언더우드 선교사는 가슴에 손을 얹은 경건한 모습입니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앞에 선 한교총 지도자. 왼쪽부터 이철 명예회장, 이영훈 대표회장, 권순웅 공동대표회장. /김한수 기자

동상은 아무리 봐도 3명인데, 퀴즈를 내고 ‘어린이는 잘 푼다’는 힌트까지 준 것은 뱃속에 아기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역시, 정답은 4명. 아펜젤러 부인 태중에 아기가 있었다는 뜻이지요. 아펜젤러 부인은 그해 11월 여자아기, 앨리스 리베카 아펜젤러(1885~1950)를 출산했답니다. 앨리스는 이화학당 교사로 근무하며 학교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양화진묘역에 잠들어 있지요.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중 누가 먼저 상륙했을까’. 둘이 손잡고 동시에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니다, 아펜젤러 부인이 먼저 상륙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레이디 퍼스트’로 두 남성 선교사가 양보했다는 것이죠.

“이 나라 백성들에게 빛과 자유를” 아펜젤러 기도문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에 새겨진 아펜젤러의 기도문. 조선 백성에게 빛과 자유를 달라는 내용이다. /김한수 기자

‘기념탑’에는 ‘오늘 사망의 빗장을 부수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간구하오니 어두운 속에서 억압을 받고 있는 이 한국 백성에게 밝은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9일 선교보고서에 기록한 기도문입니다. 부활절에 조선 땅에 당도한 선교사의 감격과 다짐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개신교 주요 30여개 교단 모임인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올해 부활절을 앞두고 3~4일 인천·강화 지역의 개신교 초기 유적을 탐방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영훈 대표회장과 공동대표회장 권순웅 목사(예장합동 총회장), 명예회장 이철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총회장), 사무총장 신평식 목사 등이 함께했습니다. 인천과 강화를 방문지로 택한 것은 이 지역이 한국 개신교의 첫 발자국이 새겨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기념탑이 세워진 곳은 인천항 바로 옆이었습니다. 지금은 거대한 크레인이 짐을 싣고 내리고 있으며 거대한 선박이 정박하는 세계적 항구이지만 138년 전 두 선교사가 도착할 당시에는 개항(開港)한 지 2년 된 작은 항구였지요. 기념탑 인근 ‘기념탑교회’ 내부엔 절벽 같은 바위가 노출돼 있었습니다. 지금은 바다를 메워 부두를 넓혔지만 두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할 당시에는 이 바위 부근이 부두였답니다.

기념탑교회 내부엔 아펜젤러-언더우드 선교사 도착 당시 부두 모습을 보여주는 절벽 바위가 노출돼 있다./김한수 기자

첫날 탐방코스는 기념탑과 내리교회, 내동교회, 인천제일교회 등 인천 응봉산 일대를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응봉산은 정상에 맥아더 장군 동상으로 유명한 ‘자유공원’이 있고 서쪽으로는 차이나타운과 일본인 거리, 북쪽으로는 제물포고와 인일여고, 동쪽으로는 내리교회와 내동교회, 남쪽으로는 제일교회가 위치한 동산입니다.

내리교회-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인천 내리교회.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는 1885년 이래 같은 자리에서 옮기지 않고 증-개축해 138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왼쪽은 복원한 웨슬리예배당, 오른쪽은 현재 내리교회 예배당. /김한수 기자

내리(內里)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 7월 29일 첫 예배를 드린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입니다. 이 교회 입구엔 머릿돌 4개를 나란히 배치한 벽이 있어 역사를 웅변하더군요. 각각 1901년, 1955년, 1966년, 1984년에 새긴 머릿돌입니다. 처음에 한옥으로 시작한 교회는 성도가 늘게 되자 1901년 붉은벽돌로 웨슬리(감리교 창시자) 예배당을 지은 이후 개축과 증축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 교회의 특징은 개축과 증축은 했지만 한번도 위치를 바꾼 적은 없다는 것이랍니다. 역사관에선 이 교회가 부흥하게 된 ‘결정적 계기’도 알 수 있었습니다. 1894~95년 청일전쟁 당시 인천 앞바다는 전쟁터였지요. 당시 주민들은 황급히 피란가면서 귀중품이나 집문서·땅문서 등을 내리교회에 내던지다시피 하고 떠났답니다. 아마도 외국인 목사가 있는 곳이니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치외법권’으로 기대했겠지요. 몇 달 후 피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귀중품과 땅문서가 잘 보존된 것을 보면서 더욱 교회를 신뢰하게 됐답니다. 또한 내리교회는 1895년 여성전용 예배당을 건축한 역사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주일 오전엔 남성, 오후엔 여성이 예배를 드렸는데, 여신도가 급증해 별도의 전용예배당을 짓게 되었다지요. 내리교회는 이후 인천과 강화, 충청 해안 지역 여러 교회들의 모(母)교회가 됐습니다.

인천 내리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머릿돌들. /김한수 기자

내리교회는 1900년대초 조선인의 하와이 이민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교회 존슨 목사가 호러스 알렌 주한미국대리공사와 함께 하와이 이민을 모집했던 것이지요. 1902년 12월말 내리교회 성도를 중심으로 121명이 하와이로 떠났고 최종적으로 97명이 현지에 도착합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하와이 이민자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한인감리교회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훗날 이승만의 가장 든든한 후원그룹이 됐지요. 하와이 교민들의 성금을 바탕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의 MIT’를 목표로 세운 학교가 인하대학교이지요. 인천의 인(仁)과 하와이의 하(荷)를 한 자씩 따서 작명했다고 합니다.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성 누가병원(일명 영국병원)이 있던 자리에 6.25전쟁 후 건설됐다. /김한수 기자

성공회 첫 교회-내동교회

내리교회에서 언덕길을 조금 더 오르면 대한성공회 내동교회를 만나게 됩니다. 성공회는 코프, 트롤로프, 랜디스 등 선교사가 1890년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조선 선교가 시작됩니다. 코프 선교사는 1891년 성 미카엘 교회를 설립하고, 랜디스 선교사는 인근 내동에 성 누가병원을 열었다고 합니다. 성 누가병원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격침된 러시아 전함의 부상 병사들을 치료한 곳이기도 합니다.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뜰에 설치된 코프 주교와 랜디스 선교사 흉상(왼쪽), '영국병원' 표지석. /김한수 기자

‘성 누가병원’과 신학원이 있던 자리가 현재의 내동교회 자리라고 합니다. 6·25전쟁 후인 1956년 영국 참전용사와 유가족 등의 성금으로 새로 세운 것이 현재의 내동교회입니다. 내동교회 정원에선 역사의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英國病院’ 표지석, ‘의학박사 엘리 바 랜디스 기념비’ 그리고 ‘고요한(코프) 주교’와 ‘랜디스 박사’의 흉상입니다.

선교지 분할 협정 따라 인천은 감리교, 장로교는 평안도-황해도 선교

분단 이후 장로교인 월남하자 장로교도 1946년 인천에 교회 세워

인천 지역 최초의 장로교 교회인 인천제일교회(왼쪽)과 손신철 담임목사. 손 목사는 "당초 인천은 감리교의 선교지역이었기 때문에 장로교는 교회를 설립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분단 이후 북한 지역의 많은 장로교인들이 인천으로 내려오면서 이들을 섬기기 위해 1946년 장로교회가 설립됐다"고 설명했다. /김한수 기자

내동교회를 나서서 자유공원 둘레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인천제일교회(손신철 담임목사)가 나옵니다. 응봉산 동쪽의 내리교회나 내동교회에선 인천 앞바다가 보이지 않지만 인천제일교회 앞에 서면 한눈에 항구가 들어옵니다. 인천제일교회는 장로교회입니다. 그런데 감리교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에 비해 60년이나 늦은 1946년에 설립됐답니다. 1880~90년대에 설립된 교회들을 보다가 1946년이란 설립 연도를 들으니 솔직히 ‘역사가 짧네?’ 싶은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습니다. 77년이면 결코 짧은 역사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손신철 목사님의 설명을 들으면 이유가 이해 됩니다. 개신교 전래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지 분할 협정’을 지켰습니다. 선교회별로 담당 지역을 나누어 과당 경쟁을 막은 일종의 ‘신사협정’입니다. 가령 평안도와 황해도는 미국 북장로교, 호남은 미국 남장로교, 인천·충청·강원도는 감리교 등으로 선교지역을 나눈 것이지요. 이 협정에 따르면 인천은 감리교 선교지역이었기 때문에 장로교는 아예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바뀐 건 남북 분단 때문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한의 개신교 신도들이 대거 월남(越南)했고, 인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로 장로교인들이 많이 내려왔지요. 그래서 이들 신도들을 위해 1946년에 인천 최초의 장로교회인 제일교회가 설립된 것이지요.

인천 지역 첫 교회들은 학교와 병원을 설립해 인재를 기르고 환자의 목숨을 살리며 지역 근대화에 기여했습니다. 이영훈 목사는 “개화기에 기독교는 의료·교육을 담당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며 “선교 140주년을 맞아 한교총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전체가 하나되어 사회를 섬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봄꽃과 산들바람이 싱그러운 인천 응봉산 주변은 걸어서 산책하기에 참 좋았습니다. ‘자유공원’과 ‘짜장면의 고향, 차이나타운’으로 기억되는 이곳 언덕길을 유유자적 걸으며 개신교 옛 스토리도 되새겨보시면 어떨까요. 다음주엔 강화도 개신교 유적 탐방기를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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