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도 미학적으로도 완전한 건축을 향해 ‘실내를 내실 있게’[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기자 2023. 4. 4.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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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배만실 전 이화여대 교수, 생활 미술과 실내 디자인
배만실이 디자인한 조선호텔 카페 ‘인형의 집’(1962·위)과 워커힐 관광센터 레스토랑(1962). 배만실은 한국 실내 건축을 개척한 1세대 디자이너였다. 최상윤 제공
1세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단순 장식·꾸밈 개념 넘어
‘생활에 유용한 미술’ 추구

2020년 10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세대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섬유예술가인 고 배만실(1923~2018)의 아카이브 기증 약정식이 진행됐다. 유족이 배만실의 생애 자료, 교육 및 연구 자료, 디자인 작업자료 등을 몇 차례 기증하면서 4800여점이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있다. 이 자료 중 일부가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막을 내린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에 전시됐다. 그가 설계한 조선호텔 인테리어 작업 사진과 도면이었다. 그 공간은 오래전 사라졌지만, 작업을 지휘했던 작가의 이름은 선명히 남아 있다. 미술, 공예, 건축을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활동을 해온 배만실은 작가지만 디자이너로서 정체성이 확고했다. ‘디자인’에 대한 개념 정립도 쉽지 않던 시절, 그는 많은 건축가들과 협업하며 실내장식에 국한되었던 인테리어 디자인을 건축 담론으로 확장하는 데 이바지했다.

배만실

1세대 여성 디자이너의 삶

1945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배만실은 1957년 미국 원조로 설립된 한국공예시범소에서 디자이너 교육을 받았다. 1958년부터 한국공예시범소가 진행한 ‘디자인 교수 요원 해외 연수 프로그램’은 미국 대학 진학을 지원하는 특별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한국공예시범소 연구원으로 있던 배만실은 두 번째 프로그램 대상자로 선정되어 1959년 유학길에 오른다.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귀국해 1961년에 이화여대 미술대학 교수가 되었다.

한국공예시범소의 해외연수 프로그램은 수혜자 개인의 삶을 바꿔놓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디자인사의 중요한 변화를 이끌었다. <한국의 디자인>을 쓴 김종균은 한국공예시범소의 이 프로그램이 “새로운 한국 공예디자인의 근간을 형성하는 사건”이었다고 설명한다. 1960년대 초 배만실을 비롯해 미국 유학생들이 귀국해 국내 대학의 교수진으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일제강점기 교육을 받고 강단에 섰던 앞선 세대가 이끌었던 현장과는 달랐다. 교편을 잡고 디자이너로 활동한 당시 젊은 유학파들은 김종균의 말처럼 “사회적으로 디자인 활동 영역을 넓혀”나가며 “국가 디자인 정책 자문가로 활동하며 전방위적이고 총괄적인 디자인 업무를 수행”해 나갔다.

배만실은 부임 후 몇년 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산업미술 전공으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마치고 학교로 다시 돌아온 그는 미술대학에 장식미술과를 신설했다. 실내 디자인과 섬유 디자인 두 전공을 좀 더 전문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는 1988년 퇴임할 때까지 장식미술과 교수로 재직하며 실내 디자인, 디자인 세미나, 직물 의장론, 장식미술사, 가구 디자인 등의 과목을 강의했다.

배만실은 디자인 교육과 실내장식에 관한 학제 기초를 닦는 동시에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공간 자문으로 참여했다. 워커힐 관광센터(1962), 조선호텔(1969), 정부종합청사(1970), 중앙청 국무회의실(1972), 대법원(1978),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78) 등이 대표적인 그의 인테리어 디자인 작업이다. 1980년대 이후에는 국가 주도 작업에서 벗어나 남산 서울 타워(1980), 여의도 MBC청사 라운지 작업(1981)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가난과 삼팔선이라는 핸디캡”

배만실은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소수의 전문가였지만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당시 많은 여성들의 삶처럼 그도 남성 중심의 현장에서 고초를 겪었다. 4명의 자녀를 서울에 두고 유학을 떠났던 그에 대한 기사는 미국 현지 신문에도 실릴 정도였다. 국민소득 100달러가 안 되는 변방 국가에서 온 아이 있는 기혼 여성의 유학은 더욱 큰 편견을 감내해야 했다. 전문직 여성에게 배움은 순수한 즐거움이 되지 못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는 배만실을 자택으로 초대해 전쟁으로 남편과 사별한 부인들을 위해 지금 배우는 것들을 쓰면 좋겠다며 독려했다고 전해진다. 이미 유학 전에도 배만실은 한국미망인공예협회 이사와 춘추양재학원 원장을 맡아 가족을 잃은 여성들에게 양재 기술을 가르쳤다. 이처럼 그가 미국에서 보고 공부한 것은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쌓기보다 실리적인 측면에 집중되었다.

그에게 공부란 황폐한 한국 사회를 풍요롭게 재건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모색하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아름다운 도시와 건축물, 디자인 사물들을 직접 보고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일상 환경을 들여다볼 때마다 우리의 빈곤한 현실을 떠올렸을 것이다. 생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은 배만실에게 조국의 “가난과 삼팔선이라는 핸디캡”을 지울 수 있는 실천적인 행위였다.

1960년대 초 워커힐호텔부터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 참여
목가구 활용 공간 설계 시도

아름다운 삶의 환경을 만들다

배만실은 무용한 미술이 아니라 생활에 유용한 미술을 추구했다. 그에게 미술이란 풍부하고 아름다운 삶의 환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 그것은 응용미술, 장식미술, 생활미술, 산업미술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 해석되었다. 배만실은 “편하고 쾌적한 삶의 환경, 기능적인 가구, 우아한 실내 배색, 생활의 합리화를 위한 채광과 통풍”을 개발하는 일을 강조했다. “실내 장식가들은 건물의 실내 구조와 가구 배치, 색의 조화, 기타 조명장치 등”을 고려해 “모든 자재의 효율성이 높은 재료와 기교를 구현하여 창의력과 탁월한 상상력을 거침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어떤 미술로 불리든 그가 강조한 일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장치를 고안하는 설계 행위, 즉 디자인이 중심에 있었다.

이러한 생활미술을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꾸리는 일이었기에, 그는 생활미술이 여성의 삶을 자립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배만실은 강의와 기고에서 여성들이 자기 생활을 미화하고 그에 맞는 기술을 연마하는 “가정 공예”를 수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제자들이 결혼과 함께 일을 그만두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생활미술의 학계 발전을 위한 각오를 강조했다. 1964년 4월 ‘이대 학보’에서 건축가 김수근과 나눈 대담에서 볼 수 있듯, 배만실은 “안일주의 결혼”을 비판했고 생활미술의 학문적 발전을 위한 학생들의 지속적인 참여와 실천을 요청했다.

배만실의 작업을 살펴볼 수 있는 대법원 법정 실내 투시도(1978). 최상윤 제공
1980년대 이후에는 교육자로
직능 강화·후학 양성에 힘써

실내 장식에서 실내 건축으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배만실의 본격적인 경력은 1960년대 초 워커힐호텔을 비롯한 여러 국가 주도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시작된다. 김수근, 김희춘, 엄덕문, 이광노, 이희태 등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과 교류했다. 건축가와의 협업을 통해 공공 기관과 호텔에 집중됐던 그의 작업은 한창 관광산업을 추진하던 정부의 정책 기조와도 닿아 있었다. 그는 실무를 병행하면서 ‘공간’ ‘건축사’ 등 여러 건축 저널에 해외 시찰 연구결과들을 소개했다. 그는 제대로 된 도면 없이 다방과 작은 점포 작업에 머물러 있던 실내 디자인 활동을 깊게 확장시켰다.

배만실은 이처럼 다양한 실내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구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전통의 현대화가 시각예술 이슈의 중심에 있던 시대기도 했다. 그는 한국 전통 목가구의 비례와 질서를 분석했다. 1974년 <조선후기 목공가구의 일 연구: 면 구성비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를 발전시켜 1978년에는 <이조목공가구의 미>를 출간했다. 한국 목가구를 그저 골동품으로만 바라볼 뿐 연구는 거의 없던 시기였다. 이러한 연구들을 근거로 그는 자신이 설계한 현대적인 공간에 어떻게 목가구를 조화롭게 배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한식 공간 설계를 많이 했다.

1980년대부터 배만실은 실무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직능을 강화하는 교육자 역할에 집중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실내 장식가라 칭하고 그 행위를 실내 장식에 주로 한정했다. ‘실내건축’이라는 말 자체가 낯선 시절이었다. 하지만 서울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개최가 예정되어 있던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는 각종 건축 사업들이 서울 곳곳에 진행되며 새로운 종류의 실내 공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다. 개발의 어두운 이면도 있었으나 건축과 디자인 분야가 기술적, 양적으로 급속 성장한 시기였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꾸밈’(1979년 10월호)에 배만실이 건축가 김원, 손석진, 조성렬과 함께한 ‘인테리어 디자인의 회고와 전망’ 대담은 매우 뜻깊은 기획이었다. 연대별 인테리어 디자인 활동을 정리하고 1980년대를 준비하는 해당 지면은 한국인테리어디자이너협회(KOSID, 현 한국실내건축가협회) 설립을 앞두고 만든 자리였다. 건축이나 미술을 전공하고 실내공간에 관심 있어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는 당시 상황에서 보다 전문적인 실내 디자인 교육과 실무 자리를 만들자는 취지로 설립된 단체였다. 대담 참여자 중 가장 연장자였던 배만실은 그 자리에서 회원의 자격시험 추진과 국제 교류 활동을 강조했다. 창립부터 줄곧 협회 명예이사로 활동한 그는 2010년 한국실내건축가협회로부터 ‘대작가(Master Designer)’ 칭호를 받았다.

미술관에 보관된 아카이브
올해 탄생 100주년 계기로
연구·재해석 이뤄지길 기대

배만실 아카이브 연구를 기대하며

당시 한국인테리어디자이너협회의 설립은 건축 설계가 전문화, 세분화되는 시대 경향과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운 실내 공간을 원하는 시장의 흐름을 반영한다. 창립 당시 협회 고문이었던 건축가 김희춘의 말대로 “완전한 건축”을 향한 업계 의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건축도 공간, 가구 디자인을 넘나들면서 세부 전문 영역을 이해하고 협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건축이 ‘완전’해지기 위해 역설적으로 독단적인 세계를 고집하기보다 주변부를 이해하고 역사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일을 엮어왔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배만실이 유학 시절 그토록 바랐던 풍요로운 삶은 우리에게 이미 와 있고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물질적으로 부족할 날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뒤를 돌아보고 앞선 작가들이 남긴 시대의 흔적을 차곡차곡 모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한계까지도 기록하고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유행에 따라 바뀌는 주기가 더 짧고 잘 기록되지 않는 실내 디자인 영역은 한국 건축사의 공백이다. 국가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건축가들의 이름은 간혹 자료를 통해 드러나지만 그 안의 세부적인 공간 환경과 섬세한 내부 디테일을 책임졌던 또 다른 건축가들의 이름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1923년 4월28일에 태어난 배만실은 곧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미술관에 조용히 보관되어 있는 그의 아카이브가 누군가의 해석과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정다영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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