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포퓰리즘” 낙인…거부권·야 반발 ‘악순환’ 예고
민주당이 다시 본회의 표결 부쳐도 여당 반대 땐 통과 어려워
방송법·간호법 등 다른 직회부 법안들 ‘비슷한 경로’ 밟을 듯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며 내세운 명분은 ‘포퓰리즘 법안’이란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법안 추진을 시장 원리와 정부 재정 상황을 무시한 포퓰리즘으로 몰아세워 정국 반전을 모색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민주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재차 본회의 표결에 부치려 하지만 국민의힘 반대로 통과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앞으로 방송법, 의료법, 간호법 등을 단독으로라도 통과시킨다는 방침이다. 야당 주도 입법, 대통령 거부권 행사, 야당 반발이란 악순환이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을 때부터 재의 요구 명분을 쌓았다. 지난달 28일 국무회의에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부터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우려를 보고받은 뒤 “국무위원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이튿날엔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국민담화를 통해 대통령에게 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하겠다며 여론전을 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배경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농가 소득을 높이려는 농정 목표에도 반하고 농업인과 농촌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란 말에 압축돼 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시장의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막대한 혈세를 들여 모두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고 묘사한 부분도 그렇다. 국가 재정의 과다 지출과 자유시장 원리의 훼손, 농정 목표를 거스르는 제도를 막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농업 경쟁력 저하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게 명약관화한 법안에 대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을 행사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강민국 수석대변인은 “양곡관리법이 그렇게 좋은 개정안이라면 민주당은 왜 문재인 정권 때 통과시키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여권은 거부권 행사를 야당의 입법 독재를 견제하는 균형추로 생각한다. 민주당이 상임위 통과부터 본회의 상정까지 다수 힘으로 밀어붙인 데 대응해 휘어진 대나무를 곧바로 세웠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원내 지도부와 농촌 지역구 의원들 다수가 용산 대통령실 청사를 찾아 항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쌀값 정상화법’을 거부하여 국민의 뜻을 무시한 윤 대통령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농민들을 배신한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은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수진 원내대변인은 “윤석열 정권의 폭거는 농정, 농민에 대한 포기로 기록될 것”이라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맞서겠다”고 밝혔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실장은 “국민의힘은 야당의 밀어붙이기, 포퓰리즘으로 공격할 수 있는 기회이고 민주당은 여론상 유리하고, 호남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사안”이라며 “여야가 큰 걸로는 못 싸우고, 서로 손해볼 것 없는 이슈(양곡관리법)로 싸우는 느낌”이라고 분석했다.
민주당은 재표결을 추진하고 있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정부에서 재의 요구된 법률이 이송되면 재표결에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을 다시 의결하려면 재적의원 과반 출석과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해 현실적으로 재의결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민주당이 재표결을 추진하는 것은 대통령의 입법부 무시와 여당의 거수기 행태를 보여줄 수 있어 여론전에서 손해볼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여야 합의 없이 상정할지는 미지수다.
민주당은 대신 농산물의 최저가격을 국가가 보장하는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등 농민의 가계 안정을 도울 다른 입법을 준비하고 있다.
양곡관리법 충돌은 1라운드에 불과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국회에는 간호법, 방송법 등 야당 단독으로 본회의에 직회부된 법안들이 있다. 여야 경색 국면이 이어지면 이 법안들도 본회의 통과 후 대통령 재의 요구로 돌아오는 악순환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조미덥·김윤나영 기자 zor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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