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8% 급등에… 한은, 금리 인상 딜레마
금리동결 vs 베이비 스텝 고심
오는 11일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를 앞둔 한국은행(한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 둔화와 경기 하강 추세를 감안하면 기준금리 동결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나타내는 근원물가는 여전히 높은 수준을 지속하고 있는데다 최근 OPEC 플러스(OPEC+) 소속 주요 산유국들이 하루 116만 배럴의 원유 추가 감산을 결정, 안정세를 보였던 국제유가도 강세로 돌아섰다. 더구나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5월 2~3일(현지시간)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현재 연 4.75%~5.00%인 기준금리를 시장 예상대로 0.25%포인트 올리면 한·미간 기준금리 격차가 사상 최대인 최고 1.75%포인트에 이르게 된다. 한·미간 기준금리 격차 확대는 국내에서 달러화를 유출시켜 원·달러 환율을 상승(원화가치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여전히 고공행진 중인 근원물가= 4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3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동월 대비 4.2%를 기록했다. 이는 2월(4.8%)보다 0.6%포인트(p) 낮은 것으로, 1년 새 가장 낮은 상승폭이다. 하지만 석유류와 같이 변동성이 큰 품목을 제외해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농산물 및 석유류 제외 지수) 상승률은 4.8%로, 여전히 높은 상승세를 유지했다. 근원물가 상승률이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웃도는 것은 2021년 1월 이후 2년여만이다. 3월 석유류 가격 하락은 지난해 국제유가 급등에 따른 기저효과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물가 상승률 둔화가 뚜렷해졌다고 안심하기는 이른 상태다.
김웅 한은 부총재보는 이날 '물가상황 점검회의'에서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월 전망 당시 예상한 대로 상당폭 낮아졌다"면서도 "향후 물가 경로상에는 국제유가 추이, 국내외 경기흐름, 공공요금 인상폭 및 시기 등과 관련한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2일(현지시간) 석유수출국기구(OPEC)과 러시아 등 기타 산유국 협의체인 OPEC+가 하루 116만배럴의 추가 감산을 결정하면서 3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5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원유(WTI)는 전 거래일보다 장중 최대 8.0% 상승했다.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6월물 브렌트유도 장중 최대 8.2% 치솟았다. WTI는 배럴당 6%(4.57달러) 오른 80.24달러에 거래를 마쳤고, 브렌트유도 5.7%(4.56달러) 오른 84.45달러에 장을 마감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말과 내년 말 브렌트유 가격 전망치를 종전보다 각각 5달러 상향 조정한 배럴당 95달러, 100달러로 제시했다. 반면 씨티그룹은 유가가 공급 측면의 더 큰 불확실성 없이는 배럴당 100달러까지 상승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가운데 산유국들의 깜짝 감산은 국제유가 하락에 베팅하는 투기 세력을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미국 상품거래위원회(CFTC)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으로부터 시작된 잇따른 은행 위기로 국제유가가 급락하자 미국 원유에 대한 약세 베팅이 4년 만에 최고치로 늘었고 반대로 강세 베팅은 10년만 최저치로 줄었다. 지난달 말 금융 위기에 대한 공포가 약화하고 매도 포지션도 줄어들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고 블룸버그가 소식통을 인용해 전했다.
OPEC+가 대규모 감산 등을 통해 글로벌 원유시장을 주도할 수 있게된 배경엔 미국 셰일오일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미국은 국제 원유시장을 놓고 한때 중동 산유국들과 치킨게임을 벌였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견제하기는 커녕 OPEC+의 이번 감산분조차 메울 수 없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글로벌 금리 인상 계속되나= 급등한 국제 유가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해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계속 인상할 수 있는 새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그간 각국 중앙은행이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근원물가를 주로 참고해왔으나, 유가 상승이 소비자물가지수에 새로운 압력으로 작용하고 높은 물가 상승률이 가계의 기대심리에 영향을 미치면 통화 긴축이 계속될 수 있다고 3일 보도했다.
제임스 불러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는 불룸버그 TV와의 인터뷰에서 "OPEC+의 감산 결정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며 유가 상승은 물가 상승률을 낮추려는 연준의 과제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가는 계속 변동해서 정확히 추적하기 어렵다"며 "그중 일부는 인플레이션에 반영돼 연준의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밝혔다.그러면서 "(감산이)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불러드 총재는 지난달 올해 미국 기준금리가 연 5.625%로 정점을 찍을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한은의 딜레마= 현재로선 금통위가 11일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달 7일 방송기자초청 토론회에서 물가 전망에 대해 "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8%로 낮아졌는데 3월의 경우 4.5% 이하로 떨어지고, 연말에는 3%대에 이를 것으로 본다"고 말한 바 있다. 물가지표가 한은의 예상 경로에 부합하는 만큼 기준금리를 지난 2월 회의에 이어 한 번 더 동결하고 상황을 더 지켜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국제유가가 더 올라 소비자물가 상승 압력이 높아지면 '베이비 스텝'(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을 단행할 수도 있다. 한은은 국제유가가 올해 배럴당 평균 70~80달러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다른 변수는 연준의 행보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4.75~5.00%)는 한국(3.50%)보다 최고 1.50%p 높은데, 5월 FOMC에서 '베이비 스텝'을 단행할 가능성이 높다. 한은이 금리를 동결하고 연준만 금리를 올릴 경우 한·미간 기준금리 격차는 1.75%p로 사상 최대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더 높은 수익률을 좇아 국내 시장을 떠나게 되고, 달러화 가치를 올려 (원화 가치 하락·원달러 환율 상승) 국내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강현철기자 hc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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