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이든 90이든 ‘밤안개’ 부르겠다”…멋지고 떳떳했던 현미 별세

2023. 4. 4.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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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현미. [연합]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밤안개’, ‘떠날 때는 말 없이’를 비롯한 시대의 명곡으로 대중음악계를 풍미한 원로가수 현미(본명 김명선)가 4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경찰과 가요계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7분께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쓰러진 현미를 팬클럽 회장 김모(73)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현미는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사망 판정을 받았다.

고인은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평양에서 거주, 어린 시절 김일성 앞에서 노래를 부를 정도로 유명했다 .1·4 후퇴 때엔 평안남도 강동에 있는 외가로 피난을 갔다. 이 과정에서 어린 두 동생과 헤어졌다가 60여년이 지난 1998년 동생들과 평양에서 재회하기도 했다.

처음 마이크를 잡은 것은 1957년이었다. 덕성여대에서 고전무용을 전공한 고인은 돈을 벌기 위해 칼춤 무용수로 미8군 공연 무대에 섰다. 그러다 공연 펑크를 낸 여가수의 대타로 노래를 부른 것이 계기가 돼 가수로 첫 발을 디뎠다. 당시 김정애·현주와 함께 여성 3인조 그룹 ‘현 시스터즈’를 결성했다.

본격적인 데뷔는 1962년으로 본다. 현 시스터즈 시절부터 고인을 눈여겨 본 작곡가이자 색소폰 연주자 고(故) 이봉조(1931∼87)에게 발탁, 가수의 길을 걸었다. 당시 이봉조와 함께 작업한 1집 수록곡 ‘밤안개’가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 김기덕 감독이 연출한, 엄앵란·신성일 주연의 영화 ‘떠날 때는 말 없이’의 주제곡을 비롯해 ‘보고 싶은 얼굴’ ‘몽땅 내 사랑’ ‘무작정 좋았어요’ 등의 히트곡을 내놓으며 1960년대 풍미한 대표적인 여가수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한명숙·패티킴·이미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디바였고, 손석우·길옥윤과 같은대중음악계의 굵직한 작곡가들의 곡을 받았다.

고인은 해외에서도 이름이 난 가수였다. 1971년 이봉조가 작곡한 ‘별’로 제4회 그리스 국제가요제 ‘송 오브 올림피아드’에 입상했다. 1981년엔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돼 축가를 불렀다. 한국에선 흔치 않은 독보적인 재즈 풍 보컬을 선보인 고인의 가창력은 한국을 넘어 일찌감치 해외에서도 인정받았다.

가수로의 활동엔 누구보다 열정과 자부심이 넘쳤다. 그는 2007년 데뷔 50주년 기자회견에선 “목소리가 안 나오면 모를까 은퇴는 없다. 나이가 80이든 90이든 이빨이 확 빠져 늙을 때까지 ‘밤안개’를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수는 건강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팬들에 대한 보답”이라며 “사라지더라도 멋지고 떳떳하게 가는 것이 참모습이라 생각한다”고도 했다. 또 베트남 전쟁 위문 공연을 세 번이나 다녀오기도 했던 고인은 “가수 생활 중에 베트남 전쟁 위문공연이 가장 보람있었다”는 소회도 전했다.

2017년엔 60주년 기념곡 ‘내 걱정은 하지 마’를 발표했다.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2’를 비롯해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최근까지 TV를 통해 시청자와 만났다. 특히 2020년 방영된 웹예능 ‘영리한 문제아들’에선 트로트랩을 구사하고자 하는 후배 래퍼를 위해 트로트 선생님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 엔 이산가족 고향체험 VR(가상현실) 콘텐츠 제작에도 참여, 두 친동생과 60여 년간 이산가족으로 이별했던 가정사를 공개하기도 했다. 가요계 후배들은 늘 유쾌한 입담으로 주변을 즐겁게 하고, 노래는 물론 연예인으로 끼가 넘치는 멋진 선배로 고인을 기억한다. 대중과도 가까이에서 함께 했다. 20년 이상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현미의 파워 노래교실’을 진행하기도 했다.

현미의 음악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 작곡가 이봉조는 훗날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며 대중의 축하를 받았다. 하지만 이봉조가 이미 결혼해 자녀까지 둔 상태였고, 두 사람은 1976년까지 부부 관계를 유지하다 결별했다. 이봉조와의 사이엔 아들 이영곤·영준씨를 뒀다. 고인은 2014년 한 강연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내 스승이었기 때문에 이봉조 추모음악회와 이봉조 묘 등을 관리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고인의 첫째 아들 이영곤씨는 ‘고니’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했다. 고인의 둘째 며느리는 가수 원준희다. 노사연은 현미의 조카다. 빈소는 서울 중앙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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