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다고, 짧다고 고민 말아요···유희관이 있잖아요
유희관은 130㎞ 초중반의 직구와 70㎞대의 초저속 변화구로 타자들을 요리하는 ‘상식파괴형’ 투수였다. KBO리그에서 11시즌 동안 올린 승수만 101승. 한 해 18승을 쓸어 담기도 했고 어떤 해엔 삼진을 126개나 뺏었다.
딱 1년 전인 2022년 4월 프로야구에서 은퇴하며 유희관은 "공이 느린 투수들이 나를 보고 용기를 가지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은퇴 후 1년. 유희관은 야구장 안팎에서 ‘미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야구 해설위원으로 자리를 잡았고 출연한 방송을 물어보면 10개 가까운 프로그램 이름이 줄줄이 나올 정도로 부르는 곳이 많다. 좋아하는 골프를 더 자주 칠 수 있게 된 것도 좋은 점 중 하나다. 야구에선 공이 느린 투수들의 희망이고 골프에선 장타가 아닌 골퍼들의 희망이다.
지금의 생활은 선수 시절 생각했던 은퇴 이후의 삶과 같나.>>>
“그렇다. 야구 선수 중에서 말을 잘하는 이미지로 제법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은퇴 후에 해설이나 예능 프로그램을 할 거라는 예상이 많았다. 감사하게 연락 주시는 곳이 많아서 생각했던 대로 잘 흘러가고 있다. 스포츠 스타들이 은퇴 후에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많이 하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어서 저도 자연스럽게 제가 그렸던 인생을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여러 일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일은 무엇인가.>>>
“야구 해설위원. 야구를 안 했으면 유희관이라는 사람이 알려질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야구에 대해선 계속 지켜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예능인이다’ ‘유튜버다’라고 하기엔 경력도 짧고 더 해야 될 일이 많은 것 같다.”
현역 때도 방송을 조금씩 했지만 지금은 훨씬 많이 한다. ‘생각했던 거랑 이런 건 좀 다르다’ 하는 게 있을까.>>>
“제가 판단할 부분은 아니지만 녹화할 때 현장 분위기가 좋아도 방송으로 보면 좀 재미없게 나오거나 그냥 그랬던 것 같은데 굉장히 재밌게 나오는 경우가 꽤 있더라. 저한테 중요한 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적응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은퇴 이후에 여러 활동을 통해서 친해진 사람들은 누군가.>>>
“지금은 두산 베어스 사령탑인 이승엽 감독님이랑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친해졌다. 선수 땐 같은 팀에 있지 않아서 교류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분이지만 개인적인 성격이나 생활 등에 대해선 잘 몰랐는데 ‘최강야구’(은퇴 선수들을 모아 팀을 꾸리고 경기하는 프로그램) 찍으면서 왜 이분이 국민타자로 불리는지 알겠더라.”
어릴 때 롤모델은 누구였나.>>>
“이상훈(전 LG 트윈스) 코치님.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마운드에 뛰어 올라가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었다. 그래서 대학교 때 이상훈 코치님 현역 시절 등번호인 47번을 달았다. 최강야구 프로그램에서도 47번을 달고 뛰었다.”
헤어스타일을 자주 바꿨었는데 지금의 이 스타일은 꽤 오래 유지하는 것 같다.>>>
“2년 좀 넘었는데 지금의 머리스타일이 저랑 ‘찰떡’으로 잘 맞는 것 같다. 트레이드 마크처럼 각인된 것 같기도 하고. 운동했던 사람이라 유니폼을 안 입으면 잘 못 알아보시는데 코로나19 시기에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어딜 가든 잘 알아봐 주시더라. 저밖에 할 수 없는 머리니까. 가족력으로 약간 탈모가 있어서 기르고 싶어도 기를 수 없는 이유도 있다.”
방송에서 야구부 시절 부산으로 도망갔던 얘기를 살짝 했는데, 더 듣고 싶다.>>>
“워낙 운동이 힘들었으니까. 고교 1학년, 대학 1학년 땐 훈련 마치면 정리 같은 것도 맡아서 해야 하는 위치였으니 일탈을 했었다. 4박 5일쯤 머리 식히고 왔다. 돌아갈 땐 혼날까 봐 굉장히 두려웠는데 의외로 너그럽게 받아들여준 감독님 덕분에 그 이후로 운동을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유튜브 보면 관중석에서 야구 보는 영상이 인기다. 문화체육관광부 공식 서포터스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도 관중석에서 보고 오지 않았나. 마운드나 더그아웃이 아닌 관중석에서 보는 야구는 어떤가.>>>
“마운드나 더그아웃에선 시야가 한정적이었는데 관중석에선 전체가 다 잘 보인다. 야구장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볼 수 있어서 재밌다. ‘야구 보는 분들은 경기 관람뿐 아니라 이런 맛에 ‘직관’하는구나’ 싶다. 탁 트인 시야로 명승부를 감상하는 맛, 얼마나 좋나.”
오래 전 얘기지만 2015년 국제 대회 프리미어12 대표팀에 최종 낙마했다. 한 시즌 18승을 올리고도 태극 마크를 못 달았으니 한이 됐을 것 같은데.>>>
“국가대표를 뽑는 분들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한 것이다. 지금 돌아봐도 굉장히 아쉽긴 하다. 느린 공이 국제 무대에서도 통할 것인지에 회의적인 시선이 꽤 많았다. 제가 부족해서 안 됐다는 생각만 하려고 애썼던 기억이 있다.”
최강야구 시즌1에서 MVP까지 받았다. 방송에선 다뤄지지 않았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단합이 잘 돼서 촬영 없는 날엔 골프를 자주 쳤다. 최강야구 때보다 골프 라운드 때 다들 승리욕이 더 불타올랐던 것 같다. 편을 나눠서 그린피 내기도 했으니.”
누가 가장 잘 치나.>>>
“이승엽 감독님.”
누가 제일 못 치나.>>>
“심수창 선배님 골프 실력이 아직은 좀 부족하다. 기복이 있는 편이다.”
골프는 언제 어떻게 배우게 됐나.>>>
“주변에서 야구 선배님들이 골프 배워보라고 많이들 추천하셨다. 그 전에 보는 걸 워낙 좋아하기도 했었고. 집에서 쉴 때 골프채널을 틀어 놓고 있을 정도였다. 골프채를 처음 잡은 건 2012년이다. 본격적으로 친 건 2014년이나 2015년쯤이다.”
베스트 스코어는.>>>
“화이트 티(레귤러 티잉 구역)에서 83타.”
야구 선수들은 대부분 장타자라 블루 티나 그 뒤에서 친다고 들었다.>>>
“맞다. 하지만 저는 거리가 안 난다. 화이트에서 친다.”
거의 매번 함께하는 고정 동반자가 있나.>>>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시간 맞는 사람끼리 그때그때 뭉쳐서 간다. 그게 또 골프의 매력인 것 같다. 모르던 분들이랑 나가서 좋은 인연을 맺을 수도 있고. 골프장도 가리지 않는다. 야구는 아는 구장에서 매번 경기하지만 골프는 다르다. 구장마다 코스 스타일이 다른 데서 오는 굉장한 재미가 있다. 야구로 치면 투수인 제가 마운드가 아니라 타석에 서는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고 할까.”
골프는 왼손이면 불편하다. 오른손으로 할 생각은 없었나.>>>
“(왼손잡이용) 골프채 구하기도 쉽지 않고 연습장에서도 맨 구석에 왼손 타석이 있으니 여러모로 불편하긴 하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시작했다면 더 못 치지 않았을까. 오른손으로 치는 걸 아예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쭉 왼손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타자들 중엔 좌타자인데 오른손으로 골프 치는 사람도 있다. 야구는 레벨(수평) 스윙이 기본이고 골프는 어퍼(올려 치는) 스윙이 기본이기 때문에 왼손 타자가 왼손으로 골프하면 야구 스윙이 망가질지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드라이버 샷으로 220m 정도 보내는 것 같더라. 일반 아마추어 골퍼면 짧지 않은 거리지만 야구 선후배들 사이에선 ‘최단타’일 것 같다.>>>
“맞다. 가장 큰 약점이 드라이버 샷 거리다. 그래서 티샷을 4번 아이언으로 할 때도 많다. 아이언 샷이 강점이라고 봐도 좋다. 롱 아이언을 엄청 어려워하는 분도 많은데 저는 제 스윙이랑 맞는 건지 롱 아이언은 편하다. 4번 아이언으로 200m 보낸다. 18홀 동안 드라이버 티샷을 한 번도 안 한 적도 있다. 그래서 동반자들한테 욕을 먹기도 한다.”
처음 같이 라운드하는 분은 장타를 기대할 텐데.>>>
“첫 홀 나가기 전에 굉장히 궁금해 하신다. 일단 운동선수니까 얼마나 멀리 칠 건가 기대하는 거다. 저는 그런 기대를 확 깨주는 역할인 거다.”
유희관 선수의 야구는 ‘느림의 미학’으로 유명했다. 자신의 골프에 수식어를 붙인다면.>>>
“골프의 장타자를 야구의 투수로 치면 강속구 투수 아닌가. 저는 야구에서 제구력으로 승부를 걸었던 것처럼 골프도 똑같이 하는 것 같다. ‘따박따박’ 치면서 쇼트게임, 퍼트처럼 ‘손재주’로 스코어를 지키는. 야구처럼 제 골프도 느림의 미학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골프도 그런 것 아닌가. 아무리 멀리 쳐도 페어웨이에 떨어뜨리지 못하면 어려움을 겪을 확률이 높으니까. 바른 방향으로 정확하게 치는 걸 추구한다.”
퍼터가 특이하다.>>>
“이승엽 감독님이 선물해주신 건데 1년 정도 썼다.”
골프 연습은 자주 하나.>>>
“부끄럽지만 저는 필드 라운드가 곧 연습인 골퍼 같다. 클럽하우스에서 코스로 딱 나갔을 때 펼쳐진 드넓은 초록을 보면 그 자체로 힐링이다. 물론 첫 티샷을 하자마자 스트레스가 밀려오긴 하지만. 현역일 땐 쉬는 날 골프를 치러 가면 스트레스를 풀러 갔다가 오히려 야구장에서 받은 것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오는 날도 많았다. 다시 생각하면 연습도 잘 안 하면서 필드 나가서 잘 치려고 하는 건 욕심인 것도 같다.”
스트레스 받을 때가 많아도 골프가 좋은 이유는.>>>
“투수라서 던지는 운동만 하고 타자들처럼 공을 칠 일은 없는데 골프는 어쨌든 공을 치는 운동이니까 재밌고 좋다. 그리고 마음대로 안 되는 운동이어서 더 끌리는 것도 있다. 그런 얘기 있지 않나. ‘야구 선수는 날아오는 공도 잘 치는데 왜 서있는 공은 못 치냐’는. 저는 농구도 좋아하고 탁구도 곧잘 해서 야구 선수들 사이에서 운동 신경 좋다고 인정받는 편인데 골프는 안 되니 도전 의식이 더 생긴다. 쳤을 때 공이 살아서 나가는 느낌, 퍼트가 들어갈 때 들리는 ‘땡그랑’ 소리까지 매력이 다양하다.”
야구, 농구, 골프 말고 또 잘하고 좋아하는 운동은.>>>
“탁구, 테니스, 당구, 볼링 등 공으로 하는 건 다 좋아하고 제법 잘하는 것 같다. 당구는 150~200, 볼링은 에버리지 220~230 정도다.”
야구와 골프에서 각각 인생 최고의 경기는.>>>
“야구는 프로야구 선발 첫 승. 2013년 5월 4일 LG전이다. 통산 100승 경기, 연속 한 시즌 10승 이상 경기, 팀이 우승한 경기도 기억에 남지만 그래도 첫 승 기억은 못 이긴다. 1이 없었다면 100도 없었을 테니까. 골프는 베스트 스코어를 냈던 경기도 좋았지만 작년에 처음으로 ‘올림픽 파’를 했던 그 라운드가 기분 최고였다. 1번부터 5번까지 연속 파. 근데 본인 핸디(핸디캡)는 결국 돌아온다는 말 있지 않나. 그날 89개 쳤다.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 치는, 딱 그냥 골프 재밌게 칠 수 있는 수준인 것 같다.”
골프로 꼭 이루고 싶은 것은.>>>
“홀인원. 돈이 많이 나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인생에 홀인원 한 번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골프 대회 중계 자주 보는지, 응원하는 선수는.>>>
“자주 본다. 요즘은 박현경 선수 응원한다. 기본적으로 프로골프 투어 선수들을 같은 운동선수로서 ‘리스펙’하는 부분이 있다.”
친분 있는 골프 선수도 많다고 들었다. 레슨 받을 기회는 없나.>>>
“생각해보면 골프 선수도 야구 선수처럼 월요일이 휴일이다. 근데 쉬는 날까지 골프하자고 하면 스트레스일 것 같다. 야구 선수한테 월요일에 야구하자고 하는 거랑 똑같을 거란 생각이다.”
구독자가 11만 명인 유튜버이기도 하다.>>>
“시작한 지 아직 1년이 안 됐는데 감사하게도 엄청 빠르게 구독자가 많아졌다. 야구 발전을 위해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걸 좋게 봐주시는 듯하다.”
콘텐츠 아이디어는 직접 내나. 계속 야구장 투어나 체험 쪽으로 가는 건가.>>>
“스스로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편이다. 제한을 두지 않고 스펙트럼을 넓혀나갈 계획이다.”
‘이런 야구 해설자가 되겠다’라고 생각하는 게 있나.>>>
“1년 했는데 많이 부족하다. 더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고 무엇보다 야구 팬들이 들었을 때 편안하면서 지식도 정확하게 전달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해야 한다. 해설하시는 선배님들이 많은데 그분들 각각의 장점을 쏙쏙 빼와서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
5년, 10년 뒤의 모습은 어떨까.>>>
“저도 굉장히 궁금하다. 제3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결혼도 했을 거고 아이도 키우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으면 좋겠다. 근데 그때까지 결혼 못 하면 어쩌나.”
양준호 기자 사진=유영호 작가 miguel@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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