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속 ‘토박이 우리말’ 캐내느라 팔순에도 바쁘네요”
올해 84살인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은 한글학자이자 토박이 땅이름 전문가이다. 전국을 세 바퀴 돌며 모은 자료와 고서를 토대로 1994년 두 권으로 출간한 <우리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는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2001년부터 18년 동안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을 맡아 지하철역이나 신도시, 공원 이름을 짓는 데도 힘을 쏟았다. 서울 송파구와 경기도 하남, 성남 지역 일부를 묶어 만든 ‘위례 신도시’와 광주광역시와 전남 나주시에 걸친 ‘빛가람 신도시’ 이름도 그의 작품이다. 위례는 ‘울’(우리)의 뜻이며 빛가람은 광주의 ‘빛’과 나주 영산강의 ‘가람’을 합쳐 지었다. 하나은행과 한솔제지 같은 한글 사명도 그의 작품이다.
최근 마리북스 출판사가 낸 ‘우리말글문화 총서’의 하나로 <또 하나의 생활문화지도 땅이름>을 펴낸 배 회장을 지난 31일 서울 용산의 사무실 ‘이름사랑’에서 만났다.
“우리말 연구를 위해 20대 후반이던 1960년대 중반 전국을 돌 때 땅이름은 ‘우리말의 화석’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땅이름을 캐면 우리말이 나오니까요.” 그는 1984년 발족해 현재 회원이 80여 명인 한국땅이름학회의 설립 제안자로서, 2009년 3대 회장을 맡아 4회 연임했다. 1998년부터 7년간 연세대 사회교육원에 땅이름 강좌를 열어 500여 명의 제자도 길렀다.
그는 이번 책에서 반세기가 넘는 우리말 연구 내공을 살려 가재울이나 노루목, 곰달내와 같은 토박이 지명의 생성과 변천 과정을 찬찬히 짚었다. 특히 토박이 땅이름의 애초 뜻이 음운의 변화나 한자 혹은 일제 식민통치 등 다양한 영향으로 후대인에게 잘못 전달되고 있는 점을 강조했다.
“곰나루는 ‘큰’을 뜻하는 우리말 ‘검’에서 생겼는데 사람들은 곰이 건너다닌 나루라고만 믿어요. 곰이 들어가는 한자 웅진(熊津)으로 곰나루를 표기한 것도 영향을 미쳤죠. 이렇게 한번 생각이 굳어지면 아무리 토박이 지명의 처음 뜻을 말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가장 흔한 토박이 지명 중 하나인 ‘가재울’도 가장자리 뜻인 우리말 ‘갓(갖)’이 뿌리인데도 사람들은 가재가 흔했던 곳으로만 잘못 알고 있단다. 짐승 노루를 쉽게 떠올리는 ‘노루목’ 역시 그 뿌리는 ‘넓다’나 ‘노랗다’를 뜻하는 토박이말에서 출발했다. “우리 땅의 그 많은 노루목 중 실제 노루와 관련된 곳은 거의 없어요. 그러려면 여우목이나 늑대목, 범목도 있어야 하는데 이런 이름은 별로 볼 수 없거든요.” ‘민족의 영산’으로 불리는 강화 마니산(摩尼山)의 토박이 이름은 마리산으로, 그 뿌리는 으뜸을 뜻하는 우리말 마리(마루)이지만 일제 때 한자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이런 뜻이 사라졌단다.
1960년대부터 ‘우리말 찾기’ 나서
2001년부터 18년간 국가지명위원
‘위례’ ‘빛가람’…수많은 이름 지어
오는 8월 새 건물에서 계속 ‘강의’
반세기 연구한 ‘지명 변천’ 묶어내
‘또 하나의 생활문화지도 땅이름’
그는 특히 ‘물의 마을’이라는 뜻의 토박이 땅이름 ‘뭇막’(무수막)이 한자어(문막·文幕)로 바뀌면서 처음 의미가 없어진 점을 안타까워했다. “물의 고어가 뭇, 무수입니다. 원주의 문막은 드넓은 평야에 섬강 물길이 지나 뭇막(문막)으로 불리던 곳이죠. 이것이 한자 지명 문막이 되면서 물가 마을이라는 본래 뜻이 사라졌죠.”
서울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도 토박이 땅이름을 지워버린 대표적인 예이다. “역이 있던 곳은 바람이 차게 불어 찬바람재였어요. 그런데 역 이름을 지으면서 처음 뜻은 물론 지형과도 무관하게 ‘푸른 풀이 무성한 들판’이라는 뜻을 땄어요. 근거도 없이 말입니다.”
그는 한국전쟁 전후로 형편이 어려워 경기 과천에서 30리 거리인 ‘검은돌’(흑석동)까지 가서 새벽 시장이 열릴 때 나무를 팔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흑석동을 검은돌이라고 했어요. 노량진은 노들이라 했구요.”
‘소년 나무장수’ 시절 검은돌 시장에서 눈에 확 들어온 아동 잡지 <소년세계>를 어머니를 졸라 산 게 그의 인생을 바꿨다고 한다. 그는 이 잡지에 자신의 어려운 삶을 소재로 글을 보내 특선작으로 뽑혔고 발행인 고 이원수 선생이 손수 쓴 칭찬 편지까지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아동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우리말 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도 1960년대 중반 주간으로 있던 <소년> 잡지에 연재물(사라져가는 우리말)을 집필하면서다. 이 글을 위해 우리땅 곳곳을 돌아다니던 배 회장은 우리말 모음에 따른 각 지방말의 특성을 찾아 발표하기도 했다. 경상도는 ‘어’, 전라도는 ‘오’, 충청도는 ‘으’, 서울은 ‘아’에 가깝게 발음한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경상도는 입안 공간을 넓혀 발음하는데 전라도는 입을 오므리고, 충청도는 입을 납작하게 벌려 편안한 입으로 발음해요. 서울은 모음들을 고루 잘 내는 편이죠.” 그는 이를 더 확인하고자 지방에 가면 뒷간(화장실) 주위 푸서리(잡초가 무성한 땅)에 녹음기를 감춰 놓고 변을 볼 때 힘주는 소리까지 채록했다. “‘엉’, ‘응’, ‘잉’ 등의 힘 주는 소리를 통해 지방별 모음 발음 분포상을 알아낼 수 있었죠.”
그는 요즘도 사무실에서 하루 평균 열 사람 정도의 이름을 지어 준단다. “이름은 한글과 한자가 반반이죠. 사람들이 대개 전통 작명을 원하는데 한자와 한글 이름을 섞어서 대여섯 개씩 지어 줍니다. 한글 이름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요즘은 좀 많아졌어요”
그는 새 건물을 신축해 오는 8월께 사무실을 옮길 계획인데, 여기에 큰 강의실을 만들어 토박이 지명 중심의 강의를 할 계획이다.
토박이 땅이름이 사라지고 있느냐는 물음에 배 회장은 “그렇다”고 답했다. “사람들이 부르는 빈도가 줄어드니 자연히 사라집니다. 벌말이라는 땅이름도 2년 정도 역 이름으로 쓰다 아파트 지역이 되면서 평촌으로 바뀌었잖아요.”
그는 토박이 땅이름을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하철역이나 공원, 도로 이름에 넣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애오개역을 보세요. 토박이 땅이름을 역에 새겨 놓으니 사람들 입에 돌잖아요.”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이런 바람도 나타냈다. “4년 전에 서울시 요청으로 ‘서울의 토박이 땅이름’ 지도를 만들었어요. 경기 여주는 동과 읍면별로 만들었구요. 다른 지역도 이런 지도를 만들어 우리의 옛 땅이름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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