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불행을 피해 다니지 않고 불행조차 안아주고 싶다
[[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그들이 무사해야 나도 무사하고
내가 무사해야 그들도 무사하다
[1]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은 아무 탈 없이 하루를 보내게 해 달라는 말이다. 교통사고가 나서 다치지 않으면 무사해서 다행이라 하고 병역을 마친 아들에게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한다. 별일 없지? 그런 말도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말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 하루를 무사히 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마음을 다쳐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도 몸은 다치지 않았으니 무사하다고 말한다. 몸을 다친 것은 보이고 마음을 다친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겠다. 내가 어떤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했거나 어떤 사람이 내 마음을 다치게 했다면 오늘도 무사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은 몸보다는 마음이어야 하고 나보다는 남이어야 한다. 행복이라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할 때 나도 행복한 거지 나 혼자 행복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꽃도 행복하고 산도 행복하고 하늘의 구름도 행복해야 나도 그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거지 메마른 세상에서 나 혼자 행복하다고 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2] 사람들 마음속에는 부지런함과 게으름이 있다. 게으른 사람은 게으름이 부지런함을 물리친 것이고 부지런한 사람은 부지런함이 게으름을 물리친 것이다. 언제부턴가 나도 게을러지기 시작했는데 내 속에 있는 게으름이 뇌까지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나는 게으름뱅이가 되었고 혹시라도 나의 게으름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하면 게으름이 아니라 여유라고 우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의 여유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으름에 끌려다니면서 날마다 불안한 하루를 보내던 나는 하루빨리 부지런함을 되찾고 싶었다. 게으름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발 일 좀 하게 해 달라고 빈 적도 있었다. 소용없었다. 나는 서서히 무너졌고 무너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니 뇌가 말라가는 것 같기도 하여 두렵기까지 하였다.
[3] 지난날 우리나라에 큰 붕괴 사건이 있었다. 1970년 4월 8일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그것이다.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첫 번째 원인은 부실시공, 두 번째 원인은 관리 소홀, 세 번째 원인은 하중의 문제라고 하였다. 성수대교의 경우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신문, 방송에서는 건설사가 잘못 지었다는 부실시공으로 결론을 내렸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여러 가지였는데 그 가운데 설득력 있는 얘기가 하나 있었다. 규정을 어기고 적재함에 많은 짐을 쌓아서 다리를 건너는 트럭들이 많았는데 하중을 견디지 못한 다리가 너무 힘들어서 무너졌다는 것이다.
[4] 술이라는 것도 자기 취향에 따라 좋고 나쁨이 갈리지만 술 자체로 말하자면 나쁜 술은 없다. 혹시 나쁜 술이 있다면 나쁜 술을 만든 사람이 나쁜 거지 술이 무슨 죄가 있겠나. 하지만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너무 많이 마시면 독이 된다. 모자람보다 지나침이 나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적당히 살아라.’ 이 말은 대충 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정도에 맞게 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날마다 조금씩 마시는 술은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술로 인해 간에 무리가 간다면 간의 기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간이 힘들어하면 건강이 무너지는 것이다.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아무리 사랑이 좋다고 한들 그날그날 필요한 사랑을 해야지 용량초과를 하여 피곤할 정도로 사랑을 하게 되면 마음에 무리를 주게 되고 그 사랑을 소화하지 못해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5] 요즘 들어 땅 꺼짐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분노나 증오심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노, 증오, 복수심, 욕심의 무게는 사람의 몸무게보다 훨씬 무거워서 저울에 표시되지 않는다. 그것들을 가슴에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많으니 땅도 그 무게를 어쩌지 못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며칠 전에 어느 집에서 가스 폭발 사고 일어났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것 역시 가스 폭발이라기보다는 분노의 폭발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6] 평창올림픽! 가리왕산의 나무들이 베어지던 날 평온하던 내 마음에 폭풍이 몰아쳤다. 쏟아지는 슬픔에 산을 빼앗긴 나무들은 이 나라를 원망하며 말없이 사라졌다. 일제에게 나라를 짓밟힌 것이 엊그제인데 우리 스스로 이렇게 마구 짓밟다니… 단 3일간의 경기를 위해 사라진 수백 년의 원시림! 10만 그루의 오래된 역사가 하루아침에 베어졌다. 아직도 이 세상 어디에선가 포탄 소리 들리고 지구별은 오늘도 평온하지 못하다. 우리나라 겨울 축제는 살인의 추억이다. 며칠간의 즐거움을 위해 수십만 마리의 산천어가 죽는다. 오늘 하루 무사히 살기 위해 서로 기대며 사는 건데 얼음 깨는 소리가 포탄 소리보다 더 무서웠을 것이다. 산천어한테는.
[7] 모든 것은 지나간다지만 그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강물처럼 바람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지나가는 건 맞지만 상처는 남기 때문이다. 상처도 삶의 일부분이니까 함께 지나간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상처의 무게가 삶보다 더 무겁다면 함께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강물보다 무거운 것들은 강바닥에 가라앉고 바람보다 무거운 쓰레기들은 여전히 땅 위에 남는다. 학교 다닐 때 양아치 동무들한테 몇 번 얻어맞은 적이 있지만 딱 한 번 내가 휘두른 주먹에 맞은 동무도 있었다. 이상한 것은, 양아치 동무들한테 얻어맞은 것은 그런대로 지나갔는데 내가 휘두른 주먹에 맞은 아이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러니까 예로부터 맞은 놈은 편히 자고 때린 놈은 편히 못 잔다는 말이 기가 막히게 맞는 말이다. 내가 양아치 동무들의 주먹을 잊어버렸듯 내 주먹에 맞은 그 동무도 나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그 동무를 잊지 못한다. 아무리 오늘 행복했다고 해도 마음 한구석에 그 동무의 모습이 남아있으니 오늘도 무사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과거는 무조건 지나가지 않는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좀비처럼 되살아나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아무도 나를 보호해 주지 않는 세상! 오늘도 무사히 살려면 미운 짓 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나도 모르게 저지른 잘못이 누군가의 가슴에 증오심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함부로 못된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 복수심, 증오심 같은 것은 무거워서 세월과 함께 지나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남는다. 오랫동안 남아서 증오심, 복수심을 안겨 준 자의 마음을 괴롭힌다. 오늘 하루 무사히 살려면 몸이 아니라 마음이 평화로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8] 거듭 말하지만 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못해 어울리기라도 하면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나는 실수를 잘해서 가끔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그러면 다음 날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러니 하루를 무사히 지내려면 말조심하거나 아예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혼자 돌아다니거나 산에 가서 놀다 오는 버릇이 생겼다. 이따금 산신령이 노래라도 던져 주면 기분이 좋아서 한동안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기도 한다. 하루는 전철에서 손잡이를 잡지 않고 가다가 중심을 잃는 바람에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신발을 밟았다. 그 사람의 하얀 운동화에 얼룩이 생겼다. 나는 고개를 숙여 미안하다고 했는데 그 사람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나는 그날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
[9] 학교 다닐 때 버스가 생각난다. 운전석 앞 유리창 위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씨가 쓰여있는 조그만 그림을 보곤 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버스마다 거의 걸려 있었던 것 같다. 외국 소녀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인데 사고가 나면 승객들도 다치는 거니까 승객들도 그 그림을 이해했다. 내가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내 마음도 편치 않기 때문에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운전사 아저씨도 자신보다는 승객을 먼저 생각했기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그림을 걸어 놓았을 것이다.
[10] 옛날엔 새로운 것이 좋았는데 요즘엔 오래된 것이 그립다. 낡고 오래된 것은 보면 볼수록 평온해지는데 새로운 것은 왠지 대하기가 불안하다. 내가 처음 술을 마신 날, 내가 처음 학교 가던 날, 내가 처음 비를 맞던 날 나는 지금 그 처음을 기억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내가 길을 찾으려고 했던 첫 마음은 기억에 없고 내가 꿈을 찾으려고 했던 첫 마음도 기억에 없다. 하지만 앞으로 닥쳐올 새로운 처음은 알고 싶지도 않고 만나기도 두렵다. 가까스로 찾은 평온한 마음에 폭풍이 몰아칠까 봐 그렇다. 어릴 때는 처음이라는 것이 설레고 좋더니만 이제는 늙어서 그런지 설렘도 없고 순수한 감정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냥 오늘도 무사히 살고 싶을 뿐, 공연히 새로움을 만나서 내 마음에 풍파를 일으킬까 봐 두려운 것이다. 때늦은 나이에 꿈을 만날까 봐 두렵고 욕망을 만날까 봐 두렵고 사람을 만날까 봐 두렵다.
[11] 뉘우친다고 저지른 잘못이 씻겨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뉘우치며 사는 삶이 옳다. 죄책감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걸핏하면 내가 저지른 잘못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여 마음 괴로울 일이 없겠지. 마음을 감싸고 있는 물질이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감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죄책감이 있어야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을 느낄 수 있는 건데 죄책감이 없으니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을 느끼지 못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인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다. 무의식중에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중에 미안하다고 말하게 되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지만 어떤 일의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그 일을 한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일을 해서도 안 될 일이다. 행복의 기본은 남의 마음 상하지 않게 하면서 오늘 하루 무사히 사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들이 무사해야 나도 무사하고 내가 무사해야 그들도 무사하다. 그러니 나도 그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가면 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고 아무 생각 없이 화초에 물을 주면 화초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세월이 흐른 뒤에 본인의 마음도 상해 있음을 알게 된다. 아무리 미운 물건이라도 함부로 버리지 말아야 한다.
[12] 요즘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무사히 지내게 해 달라고 빈다. 몸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마음이 맑지 못하다. 한데 오늘은 누군가가 내 마음을 깨끗이 씻어 준 것 같아서 모처럼 행복하다. 하늘이 도왔나? 아니면 내가 치매 잠복기인가? 한때 내가 미워했던 사람이 내 기억에서 지워진 것 같다. 마음속에 미움이 없으니 이렇게 좋구나. 하지만 어디에선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용서를 빌어야 한다. 지난날의 나는 비겁했다. 불행을 피해 다니며 행복 뒤에 숨었지. 그때 불행을 안아 주었더라면 지금 행복했을 텐데… 그래서 오늘도 무사히 지내기가 어려운가 보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해가 저무네
하제도 탈 없이 살아야지
하늘 저 끝에 포탄 소리 들리네
아직도 그들은 싸우고 있구나
하루살이는 백 년을 살지만
사람은 하루를 사네
오늘 나는 행복했네
고마운 하루였네
-<오늘도 무사히>(1979)
글 한돌(음악가 작곡가)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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