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담대한 중견국 연대’에 나서라
[세상읽기]
[세상읽기] 김양희 |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국내에서 미국의 공급망 재편 전략이 품목별로 다르다는 점이 의외로 간과되고 있다. 반도체는 첨단사양에 국한해 중국을 배제하고 국내가치사슬(리쇼어링)이나 신뢰가치사슬(프렌드쇼어링)을 추구하지만, 대용량 배터리는 중국을 포용하며 지역가치사슬(니어쇼어링)도 허용한다. 포드에 이어 테슬라까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우회해 중국 배터리업체 닝더스다이(CATL)와 손을 잡는 모습은 반도체에서는 상상 불가다.
미국의 반도체, 반도체 장비 중국 수출은 2021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섰지만 일반 품목 수출은 중국과의 글로벌가치사슬(오프쇼어링)을 이어갈 태세다. 미국이 추구하는 건 탈세계화나 탈중국화가 아니라 재세계화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탈위험’(de-risking)일 뿐이라고 거들었다. ‘탈중국’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미국은 반도체과학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 같은 ‘현대적 산업정책’을 동원해 핵심품목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신뢰 가능한 우방으로 대체하려 하지만, 이런 신뢰가치사슬 구축 시도에 우방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문제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조 바이든 정부 임기 초반인 2021년 6월 중간보고서에서는 그 대상이 반도체, 대용량 배터리, 핵심 광물, 의약품 정도였지만, 이듬해 2월 최종보고서에는 바이오, 군수, 보건, 정보통신, 에너지, 운송, 농식품까지 줄줄이사탕으로 추가됐다. 그해 9월 미국은 실제로 바이오 카드를 꺼내 들었다.
3월31일, 일본은 미국에 보조를 맞춰 첨단반도체 장비의 대중 수출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외환법을 개정했다. 하지만 법안 어디에도 중국을 특정하지 않고 미국과 무관한 독자적인 조처로 포장했다. 반도체 장비 수출의 40% 이상이 중국으로 향하는 일본의 곤혹감이 읽힌다.
앞으로도 반도체과학법의 가드레일 조항, 인플레이션감축법의 변덕, 바이 아메리칸 법의 횡포 등 쇠퇴하는 미국의 몽니는 쭉 이어질 예정이다. 우리는 그때마다 휘둘리며 요동치길 반복해야 하나. 이제는 원칙 있고 일관된 대응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나라도 단독으로 미국의 움직임을 막기는 어렵다. 3월30일치 <이코노미스트>는 파멸적 미-중 갈등을 막으려면 서방이 대중봉쇄 대상을 민감 품목으로 제한하고, 아시아에서 전쟁 가능성을 낮추며, 개방성과 법치로 중국 정부에 우위를 점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미국이 그 선두에 있는 이상 가능한 얘길까? 기대난망이다.
12년 만에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으나 승자는 없었다. 서울의 ‘반 컵 외교’에 도쿄는 ‘빈 컵 외교’로 일관했다. 한-일 역학관계 변동이 초래한 전환기적 갈등을 일거에 통 큰 외교로 풀겠다면 역사 앞의 오만이다. 그렇다고 보호주의 진영화 시대, 비평화 시대에 양국이 직면한 격랑을 외면한다면 이 또한 미래에 무책임하다. 묘책은 없으니 고뇌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두 나라 모두 승자가 되는 길은 없을까. 다양한 협력사업 구상 이전에 다음 세가지를 기억하자.
첫째, 한-일 신뢰 회복의 동력은 선의가 아닌 국력이다. 한국은 반도체와 방산에서 제조혁신 강국으로 부상했다. 더욱이 자유와 인권 법치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본의 최인접국이다. 양안관계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이때 대만 반도체업체 티에스엠시(TSMC)를 향한 일본의 짝사랑은 근시안적이다. 일본은 한국의 전략적 쓸모를 재조명해야 한다. 한국도 전통 강호 일본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둘째, 양국은 협력 공간을 한·일이나 한·미·일이란 틀에 가둬 보호주의 진영화나 지정학적 갈등을 키우기보다, 강대국 정치로 동병상련인 처지에 바탕해 담대한 중견국 연대에 나서야 한다. 그리하여 과도한 탈세계화와 강대국 간 충돌 위험을 통제하며 규범 기반의 자유주의 복원에 힘써야 한다.
셋째, 한국의 선의가 가장된 굴종이 되지 않으려면 일본에 대한 바트나(BATNA·협상 결렬 시 대안)도 필요하다. 만일 일본이 ‘남은 반잔’을 채우지 않는 것을 승리로 착각한다면 단언컨대 일본에 미래는 없다. 그때 한국은 일본에 한푼도 받지 말고 면죄부 대신 수치심을 안겨야 한다.
태거트 머피는 역작 <일본의 굴레>에서 일본의 원죄는 자발적 탈아시아였다고 일갈한다. 그는 역사의 추가 다시 아시아로 기울고 있는 지금 일본이 이곳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려면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일본을 위해 과거사를 직시하라고 고언한다. 양국 간 소프트파워의 진검승부는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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