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언어탐방] 슬로푸드: “좋은, 깨끗한, 공정한” 음식
김용석 | 철학자
1986년 봄,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의 다국적 패스트푸드 기업 맥도날드가 로마 도심 ‘스파냐 광장’에 매장을 열었다. 사건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에게 영어식 발음인 ‘스페인 광장’으로 알려진 이곳은 로마 시민들이 사랑하는 도심 산책로 가운데 하나이자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는 명소다. 주위에 이탈리아 정통 음식점들도 많다.
매장이 문을 열기 전 로마시와 협상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민들 반대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매장 안에 ‘지중해식 샐러드’ 코너를 마련하는 것도 개장 허가 조건 중 하나였다고 한다. 당시 로마에 살고 있었던 나는 문화탐방하는 마음으로 그곳을 둘러봤는데, 실제 매장 입구에 샐러드 코너가 있었다. 그 샐러드 코너는 추후 맥도날드에 이득이 될 것이었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맥도날드 매장을 위해 그 코너를 미리 적용해보는 계기가 됐을 테니 말이다.
맥도날드 패스트푸드를 반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아이들이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아이들의 입맛과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데에 맥도날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당시 이탈리아의 문화변동이 패스트푸드 사업이 진출할 통로를 열어줬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 시작된 ‘파니나로(paninaro) 운동’이 그것이다. 1960~70년대 유럽 대학의 학생운동은 사회·정치적 개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이 잠잠해지고70년대 석유파동 이후 경제적 풍요와 함께 중고등학교 사춘기 청소년들 사이에서 퍼진 것이 파니나로다. 그들은 특별한 패션과 대중음악을 좋아하고 자기들만의 언어로 소통하며 간편식으로 이탈리아식 샌드위치인 ‘파니니’(panini)를 즐겼다. 파니니는 미국식 햄버거와 다르고 파니니를 패스트푸드라고 할 수 없지만, 맥도날드가 시장조사를 하면서 이런 문화현상을 놓쳤을 리 없다.
다른 한편 맥도날드의 로마 진출은 이탈리아에서 슬로푸드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슬로푸드는 패스트푸드가 없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말이다. 이탈리아 사람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운동이지만 영어로 이름 지어진 이유다. 패스트푸드가 국제어가 된 이상 슬로푸드도 국제어가 됐다.
그런데 이 말들에 담겨 있는 ‘빠르다’와 ‘느리다’는 수식어는 오히려 두 말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 일부 사전에서는 바로 이 수식어에 초점을 맞춰 단어를 정의한다. “패스트푸드는 주문하면 즉시 완성돼 나오는 음식을 이르는 말로서, 햄버거, 프라이드치킨, 피자 따위를 이른다”든가, “슬로푸드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만들고 먹는 음식을 일컫는다”고 정의한다.
패스트푸드든 슬로푸드든 음식을 조리하는 속도에 한정하거나 특정 음식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하려고 하면, 되레 이것들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된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피자가 패스트푸드라고 하면 매우 억울해할 것이다. 식재료에서 굽는 방식, 그리고 식탁에서 그 맛을 음미하는 풍속을 보면 슬로푸드에 가깝다. 햄버거도 통밀빵에 제대로 공급받아 구운 고기, 그리고 신선한 채소로 만들면 패스트푸드가 아니다. 반면 전통 음식이더라도 어떻게 생산되고, 어떻게 조리되고, 화학적으로 무엇을 얼마나 가미하는지에 따라 패스트푸드가 될 수 있다.
말의 기원에서도 그렇듯이 슬로푸드를 알려면 먼저 패스트푸드를 살펴봐야 한다. 탐사 전문 기자인 에릭 슐로서는 20여년 전에 쓴 <패스트푸드 네이션>에서 패스트푸드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 음식들이 어디서부터 왔고,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그 음식들이 만들어내는 길고 짧은 파급효과는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했다. 곧 매장에서 고객 주문에 응답하는 서비스의 속도 이면에 있는 모든 과정, 그 음식이 소비자의 건강과 우리 삶 전반에 미치는 영향까지 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패스트푸드의 핵심 식자재인 육류를 빠르게 많이 생산하기 위해 발생하는 노동력 착취와 산업재해, 대규모 축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 식자재의 위생 상태 등도 패스트푸드를 정의하는 요소가 돼야 한다고 했다.
슬로푸드는 패스트푸드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을 창시하고 계속 추진하고 있는 카를로 페트리니는 슬로푸드의 원칙을 세 가지로 표현한다. “좋은, 깨끗한, 공정한” 음식이다. 이 세 단어는 간단하지만 그것이 함의하는 바는 포괄적이다.
슬로푸드는 좋은 식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일 뿐만 아니라 생산지의 문화적 차이에 주목하고, 지속가능한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며, 생산과정에서 공정함을 담보해야 한다. 농촌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착취해 만들어지는 음식, 자연을 파괴하면서 만들어지는 음식은 슬로푸드가 아니다. 슬로푸드는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이 어떤 환경에서 만들어지는지, 식재료를 생산한 이들은 누구이고 어떻게 생산됐는지를 고민하는 개념이다. 곧 페트리니의 슬로푸드는 음식문화를 그 뿌리에서부터 개선하고자 한다. 패스트푸드의 획일성을 넘어 우리 식탁과 삶의 생물다양성, 문화다양성, 지역다양성 및 지속가능성을 지켜나가는 운동을 지향한다.
패스트푸드가 현재라면, 슬로푸드는 과거를 회복하고 현재를 치유하며 미래를 지향한다. 음식이 환경문제와 밀접한 것만 보아도 슬로푸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지만, 현재의 기득권으로서 패스트푸드는 힘이 세다.
슐로서의 저서를 각색해서 만든 동명의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일하던 앰버는 축산업의 실상을 알고는 학교 동료들과 힘을 합쳐 소들을 풀어주기로 한다. 그들은 목장의 울타리를 부수고 소들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소들은 그 안에서 맴돈다. 앰버는 외친다. “너희들! 자유를 원하지 않니?” 그래도 소용없다. 포기한 앰버가 묻는다. “나는 소들이 왜 울타리 안에 갇혀 있으려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동료가 답한다, “거기 있는 게 편하니까 그랬겠지 뭐, 때 되면 밥 주고, 게다가 유전자변형 사료가 풀보다 맛있기 때문 아니겠어.”
편한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에 대한 메타포로는 너무 잔혹하지만, 현대인의 음식문화, 그 정곡을 찌르는 장면이다. 슬로푸드에 있는 ‘천천히’라는 말이 각별히 떠오른다. 진정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느리더라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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