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는 ‘다르게’ 반복된다
[한겨레 프리즘]
[한겨레 프리즘] 전슬기 | 금융팀장
지난달 초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을 시작으로 크레디스위스(CS·크레디트스위스) 매각, 도이체방크(도이치은행) 위기설이 잇달아 터지면서 금융위기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이번 사태가 뼈아픈 이유 중 하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전세계가 많은 것을 바꿨지만 또다시 위험이 닥쳤다는 점이다. 우리는 또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과도한 주택담보대출과 이를 기반으로 발행된 파생상품들이 얽히고설킨 가운데 기초가 되는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연쇄적으로 부실이 번진 사례다. 반면, 실리콘밸리은행은 미국 정부가 발행해 전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불리는 국채에 투자했는데도 파산에 이르러 의아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실수의 역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복된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실리콘밸리은행의 주요 고객들은 정보통신(IT) 업체들이었고, 이들이 맡긴 거액 예금이 많았다. 아이티 업체들은 투자 호황으로 대출 수요가 크지 않았고, 은행은 예치된 예금을 미국 국채나 주택담보대출유동화증권(MBS)에 주로 투자했다. 문제는 업체들이 예금 인출에 나섰는데, 은행이 투자한 유가증권 중 79%는 잔존 만기가 10년 이상인 장기 상품들이었다는 점이었다. 은행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정책금리 상승으로 채권 가격이 하락하는 국면에서 예상보다 채권을 빨리 매각해야 하면서 손실을 크게 입었다. 안전자산인 국채의 가격변동 위험을 간과한 셈이다.
실리콘밸리은행 사례는 국내 금융권에도 중요한 생각거리를 던졌다. 실리콘밸리은행에 견줘 국내 은행들은 매우 안정적인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온 예금을 다시 대출해주는 예대업무로 수익을 내고 있으며, 유가증권 비중은 총자산의 18%에 불과하다. 대형은행 과점체제인데다 고객군도 개인과 법인으로 다양하다. ‘이자 장사’와 ‘독과점’ 비판을 받을지언정 금융안정 측면에선 양호하다는 평가가 가능한 셈이다.
2008년 이후 전세계가 조여왔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진 점도 이번 사태의 배경이 됐다. 미국 오바마 정부는 2010년 금융위기 재발을 막기 위해 ‘도드-프랭크법’을 제정했으나 이후 트럼프 정부는 일부 규제를 완화했다.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과 순안정자금조달비율(NSFR) 규제, 연준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 금융기관 기준이 총자산 500억달러 이상에서 2500억달러 이상으로 조정됐고, 실리콘밸리은행 등 중소 은행들은 규제 사각지대에 존재하게 됐다.
크레디스위스 매각 과정에서 ‘코코본드’(조건부자본증권) 22조원어치가 전액 상각되면서 벌어진 논란도 2008년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신종자본증권의 일종인 코코본드는 위기 때 주식으로 강제 전환하거나 상각되는 조건이 붙은 채권이다. 회계상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분류돼 위기 때 손실을 흡수하는 역할도 한다. 금융위기 때 공적자금 대거 투입에 따른 논란을 겪으면서, 은행이 부실해지면 투자자들도 손실을 분담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도입됐다. 코코본드의 수익률이 높은 이유는 이처럼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인데, 투자자들이 이런 특징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비슷한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다. 지난해 11월 금융시장 경색 국면에서 흥국생명은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 연기로 시장이 흔들리자 차환 없이 조기상환했다. 신종자본증권은 영구채 성격이 있어 자본으로 인정되는데, 조기상환이라는 관례를 따르지 않으면 시장이 위기 신호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자본을 깎아 먹으면서까지 상환에 나서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금융위기는 잘 대비해도 꼭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복적으로 터지더라.”
최근 한 정부 당국자의 토로다. 국내외 금융시장에는 은행권 채권 평가손실, 상업용 부동산 대출 및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등 위험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의 도화선은 없는지 살펴볼 때다.
sg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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