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김일성 제주4·3 지시" 주장에 진상보고서는 '사실과 달라'
북한군유입설·남로당 중앙당 지령설 사실무근 기재
남로당 제주도당 독자적 무장봉기로 결론
김한규, 태영호 발언에 "유족 도민 명예훼손, 법 위반"…
43특별법 "허위사실로 희생자 명예훼손하면 안돼"
[미디어오늘 조현호 기자]
국민의힘 최고위원인 태영호 의원이 제주 43 사건 발생 75주년인 지난 3일에도 사건 원인을 김일성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거듭 주장하면서 제주도민에 사과를 거부했다.
이에 제주 43사건 진상조사결과에 관한 허위사실을 유포해 희생자와 유족유족회의 명예를 훼손하면 안 된다는 '제주 43사건 특별법' 위반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결과(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엔, 북한 연루설과 소련 연루설,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을 허위로 기재하고 있어서다.
태영호 의원은 지난 3일 오전 국회 본관에서 연 최고위원회 종료후 브리핑에서 '43사건이 김일성 지시에 의해 촉발했다는 본인 주장을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의에 “어떤 점에서 사과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특정인을 조롱하고 폄훼하거나 한 일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태 의원은 재차 김일성 지시설을 주장했다.
그는 “1948년 4월3일 일어난 사건은 전후 맥락을 보면, 당시 '5월10일 대한민국의 단선(단독선거)을 무조건 파탄시키라'는 소련 공산당의 지시와, 이 지시를 받아서 (당시 평양에 있던) 남로당 박헌영에게 전달했고, 제주도 뿐 아니라 남한 전역에서 510 단독 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한 남로당의 활동이 있었다”며 “그래서 큰 맥락에서 보고, 여기에 따라서 제주도(남로)당도 그러한 결정을 내린 거고, 이런 역사의 진실은 부인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이 같은 주장은 허위사실이며, 현행법 위반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43사건 특별법)의 제13조(희생자 및 유족의 권익 보호)는 “누구든지 공공연하게 희생자나 유족을 비방할 목적으로 제주43사건의 진상조사 결과 및 제주43사건에 관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여 희생자, 유족 또는 유족회 등 제주43사건 관련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진상조사결과'란 특별법 제5조 제2항 4호의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작성한 진상조사보고서를 뜻한다. 즉 진상조사결과 내용에 반하는 허위주장으로 명예를 훼손했다는 얘기다. 제주시(을) 지역구 출신의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3일 대정부질문에서 “보고서 내용에 따르면, 제주 43은 김일성이나 남로당 지명당의 지령과는 관련이 없다고 명확하게 언급이 되어 있다”며 “정부에서 주도한 연구 결과, 43 진상조사결과보고서에 명확하게 위반되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보고서 내용을 부정하는 근거가 북한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라고 하는 태 의원 주장을 두고 김 의원은 “북한이 본인들의 주체 사상 유지하기 위해서 주민들에게 한 이야기를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서 “미래 세대에게 북한에서 배운 정부가 아니라 우리 정부가 나서서 조사에서 확인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가르쳐야 된다”고 촉구했다. 이에 한덕수 총리는 “현대사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확실하게 좀 정부로서도 노력을 더 좀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한다”고 답했다.
실제 진상조사 보고서 내용을 들여다보니
실제 특별법에 따라 제주43진상조사 및 명예회복위원회(제주43위원회)가 발간한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 북한 개입설,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 등이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한다.
특별법은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주43위원회는 사건의 진상을 이 범위에서 규명했다. 1947년 3월1일은 경찰이 시위군중을 발포해 다수가 사망한 사건발생일이고, 이듬해 4월3일은 무장대가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을 공격한 날을 뜻한다.
제주43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제주4·3사건은 구체적인 근거 제시도 없이, 소련이나 북한, 또는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 제주도를 비롯해 한반도 전체를 적화시키기 위해서 공산도배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되어 왔다”고 설명했다.
제주43위원회는 북한 배후설과 관련해 1948년 4월3일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공격한 '무장대'에 북한군 또는 팔로군이 포함돼 있다는 주장을 검증했다. 보고서는 조선중앙일보 1948년 7월21일자에 제주도 주둔 최경록 제11연대장이 '팔로군이나 북조선 인민군이 다수 가담하고 있다고 하며 또 포로도 있다는데……'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일은 전연 없다”고 한마디로 일축했다고 전했다. 제주43위원회는 “무장대원에 대한 외부 유입설은 곧 낭설임이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여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며 “특히 '북한군 유입설'은 곧이어 등장하는 '북한선박 출현설' '소련잠수함 출현설'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이후에는 모두 허위임이 밝혀졌”다고 판단했다.
'남로당 중앙당 지령에 따른 폭동'이라는 주장도 검증결과 사실이 아니라고 봤다.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은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냈다는 박갑동이 1973년부터 연재한 글을 모아 1983년에 낸 '박헌영'이라는 책에서 “중앙당의 폭동지령이 떨어졌다. 아마도 그 지령은 3월 중순쯤에 현지의 무장행동대 김달삼에게 시달된 것으로 안다”, “당시 중앙당에서는 이 사건이 터질 무렵 당 군사부 책임자 이중업과 군내의 프락치 책임자 이재복 등을 현지에 파견하여 소위 현지 집중지도로써 군사활동의 확대를 기도했다”고 주장한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박갑동은 이 주장이 외부에서 고쳐진 것이라고 실토했다. 보고서는 박갑동이 2002년 7월11일 제주43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에 채록을 통한 증언에서 “내가 쓴 것이 아니고 내 글을 신문에 연재할 때 외부에서 다 고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썼다. 박갑동은 “4·3이 510선거 반대투쟁이라지만 왜 유별나게 제주에서만 그랬겠는가”라며 “43은 서청(서북청년단)과 경찰이 횡포를 부려 발생한 사건”이라며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아니며 경찰과 서청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 안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썼다.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이었던 이삼룡도 2002년 7월11일 위원회에 한 증언에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제주43위원회는 전했다.
제주43위원회는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국방경비대에 남로당 중앙조직 프락치인 문상길 소위가 '43 직전 경비대도 호응궐기해야 한다'는 권유에 “중앙 지시가 없으니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기재돼 있다고 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남로당 전문 연구가인 김남식도 “남로당의 510선거 저지투쟁은 대중동원에 의한 정치투쟁과 폭력투쟁을 배합한 복합형태이지 전면 무력투쟁이 아니었으며, 본토에서 호응투쟁도 없었다”며 “제주도의 특수여건이 김달삼 등의 선동에 의해 터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존 메릴 박사도 자신의 논문에서 “4월3일의 공격은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남로당의 캠페인으로부터 발생되었지만 제주도당부의 전투적인 지도부의 주도 아래 감행되었다”고 썼고, 제민일보와 인터뷰에서 “나의 조사 결론으로는 중앙당의 지령이 없었다는 것이다”고 밝혔다.
1948년 지리산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고 백선엽도 그의 저서 '실록 지리산'에서 “여순반란사건은 결코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43과 마찬가지로 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이었다”고 적었다.
김일성 지시에 의해 남로당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파탄내라 했다는 태영호 의원 주장과도 배치되는 설명이 나온다. 제주43위원회는 “당시 좌파 뿐 아니라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던 김구 계열의 우파와 김규식계열의 중도파에서도 510선거가 한반도를 영구히 두동강내는 단선 단정 획책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고 반박했다.
제주 43 무장 봉기의 주체가 남로당 중앙당은 아니지만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를 주도한 김달삼은 1948년 8월 제주를 떠나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김달삼은 그해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투표에 앞서 벌어진 '입후보자에 대한 토론' 시간에 토론자로 나서 무장봉기의 발발 원인과 관련,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실시에 따른 분노가 폭발해 벌어진 자연발생적인 총궐기라고 주장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김달삼의 월북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강경진압을 부채질한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보고서의 결론에 북한의 배후설은 43사건 원인에도 거론되지 않는다. 제주43진상조사 및 명예회복위원회는 보고서 결론에서 제주43사건의 배경을 두고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및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라고 분석했다. 위원회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경찰이 시위군중에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이 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고,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反警) 활동을 전개했다”며 “미군정의 사후처리도 경찰의 발포 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중점을 두고 강공정책을 펴…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위원회는 특히 “사건 직전인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며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세력들은 군정당국에 등 돌린 민심을 이용해 두 가지 목적,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써', '당면한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써' 무장투쟁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미디어오늘을 지지·격려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덕수 “한일관계 나빠진 원인, 강제동원 대법 판결 강제집행이 문제” - 미디어오늘
- ‘세수 펑크’ 예견에도 “건전재정” 정부 입장 반복한 언론 - 미디어오늘
- 한덕수, 돌덩이 발언 “강제동원 희생자 지칭 아냐” 해명 - 미디어오늘
- 영국 감사원이 지적한 BBC 디지털전략의 한계 - 미디어오늘
- 윤석열 대통령 스트라이크 구질 분석한 조선일보에 던지는 질문 - 미디어오늘
- 불순한 꼰대들만 호명하는 ‘MZ노조’ - 미디어오늘
- 신문사 간부가 직원 44명을 고소한 사건 전말은 - 미디어오늘
- 오디션 순위 조작 CJENM의 끝없는 시청자 기만 - 미디어오늘
- 챗GPT는 기자를 대체할 수 있을까 - 미디어오늘
- 일본 NHK ‘공공성’ 중심 개편…민방은 드라마 확대 - 미디어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