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만에 세상으로' 진주 국민보도연맹사건 유해 20구 발굴

한송학 기자 2023. 4. 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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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동안 이름 없는 산에서 아무도 모르게 묻혀 계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이번에는 아버지 유해를 찾기를 바랍니다."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 피학살자 유족회' 정연조 회장(진주시 대평면)이 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한 말이다.

이번 발굴은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회)에서 1950년 7월께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일대에서 사망한 민간인들의 유해를 50여구로 추정하고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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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 중간보고회…두개골·정강이뼈 등 시신 추정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피해자 유해 발굴조사 중간보고회 현장설명회에서 발굴을 담당한 동방문화재연구원 이호형 원장이 발굴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023.4.4 뉴스1/한송학기자

(진주=뉴스1) 한송학 기자 = "73년 동안 이름 없는 산에서 아무도 모르게 묻혀 계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이번에는 아버지 유해를 찾기를 바랍니다."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 피학살자 유족회' 정연조 회장(진주시 대평면)이 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한 말이다.

정 회장은 4일 경남 진주시 명석면주민센터에서 열린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피해자 유해 발굴조사 중간보고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중간보고회는 유해 발굴을 담당한 동방문화재연구원 이호형 원장이 발굴 과정과 성과를 설명했다.

이번 발굴은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회)에서 1950년 7월께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일대에서 사망한 민간인들의 유해를 50여구로 추정하고 진행했다. 조사 범위는 225㎥ 정도다.

유해는 지난 3월27일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앞서 22일 개토제 이후 발굴을 시작한 지 6일만이다. 불과 20cm 아래 땅속에서 70년 이상 억울한 죽임을 당한 채 묻혀 있었다.

발굴된 유해는 두개골 2점과 허벅지뼈 및 정강이뼈 등 80여점으로 20구 정도로 추정된다. 탄피와 탄두도 산발적으로 나왔다. 단추, 칫솔, 틀니, 동전도 곳곳에서 출토됐다.

발굴이 진행된 규모는 길이 510cm, 너비 210~240cm, 깊이 40~0cm의 평균 20cm 정도다. 매장 상태는 구멍이 안에 매장된 유해와 이 구덩이를 덮고 있는 복토층에서도 유해가 나왔다.

허벅지뼈와 정강이 뼈 등은 일정한 너비에서 2중, 3중으로 중첩돼 나왔다. 완전한 형체의 유해와 정형성을 보이는 유해는 없다.

유해가 구덩이 내부 공간에 2~3겹 포개진 상태로 매장된 점, 정형성이 없는 점, 세워진 유골이 없이 지면에 편평하게 놓여 있는 점으로 보아 주변의 유해를 2차적으로 이 구덩이에 모아 매장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조사는 구덩이 및 유해 유품 위치에 대한 기록을 작성하고 현재까지 노출된 유해와 유품을 수습하고 추가 발굴을 할 계획이다.

강도영(76) 씨가 아버지의 유해를 찾기 위해 발굴 현장을 방문해 흐느끼고 있다. 2023.4.4 뉴스1/한송학기자

현장 설명회에서 강도영씨(76)는 "아버지 유해를 찾을 수 있다“며 목놓아 울기도 했다.

강 씨는 "아버지가 논일을 하다가 면사무소에서 오라고 해서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고 어머니에게 들었다. 이후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으러 현장에 갔다가 피투성이가 된 유해들만 보고 아버지 시신을 찾지 못했다"며 흐느꼈다.

정연조 유족회 회장은 "행방도 모른채 묻혀 있다가 모습을 드러내 것은 고마운 일이다. 선조를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된다"며 "남은 유해도 하루 빨리 발굴해 온전히 모셔야 한다. 이번 발굴에서 아버지 유해가 확인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국민의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반공단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른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 4월 20일 관변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됐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9월20일부터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하는데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

진주경찰서는 1950년 7월 15일 진주시와 진양군 관내 지서 별로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해 지서에 소집하고 진주경찰서로 구금했다. 일부는 진주형무소로 이송됐다. 이후 인민군에 의해 점령 위기에 처하면서 헌병, 경찰이 7월27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명석면 관지리, 우수리, 용산리, 문산 상문리, 마산 여양리 등에서 학살됐다.

ha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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