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뻘건 불길에 살아야겄다하고 몸만 뛰쳐나왔지"
"80평생 이런 일 처음"…전쟁통 '방불'
(함평=뉴스1) 이승현 기자 = "80평생 살다살다 이런 일은 처음이네…눈앞이 시꺼먼데 뻘건 불길만 보이니까 살아야겄다 하고 몸만 뛰쳐나왔지."
4일 오전 전남 함평군 신광면 백운2리 경로당. 이곳은 전날 발생한 함평 산불로 인근 삼덕 1·2구 주민 14명이 대피한 곳이다.
주민들은 겉옷 하나 챙겨 나오지 못해 얇디 얇은 티셔츠만 입은 채 밥 한 술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가하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종일 TV 앞에 모여 앉아 뉴스특보를 챙겨보거나 서툰 손놀림으로 휴대전화를 이용해 인터넷 뉴스를 쉴 새 없이 보며 산불 진화 완료 소식만을 기다렸다.
뉴스를 보는 도중에도 휴대전화는 계속 울렸다. 자녀, 친척, 친구, 인근 마을 주민 등이 보내온 메시지였다. 내용은 '괜찮냐. 다친 곳은 없이 잘 있냐. 걱정되니 마스크 꼭 써라' 등 온통 안부를 물어온 것이다.
인근 고속도로에서부터 하늘 위로는 산불을 끄기 위해 쉼 없이 헬기가 날아다녔고, 온 동네에는 뿌연 연기가 자욱했다.
마을로 들어서자 소방차와 경찰차가 드나들었고, 주민들은 매캐한 연기에 마스크를 쓴 채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면사무소 인근을 들른 소방관들의 현장복과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삼덕 1구 주민 이영자씨(80·여)는 "마을회관 앞으로 대피하라는 방송을 듣고 하나 둘 뛰쳐나오는 상황이 전쟁통을 방불케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어제 오후 3시쯤 눈앞에 시뻘건 불이 집 앞산에 넘어오는 게 보이는 찰나에 소방차 소리와 함께 '대피하라'는 마을방송이 울렸다"며 "혈압약과 소지품을 챙길 새도 없이 살자고 몸만 뛰쳐 나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평생을 이 동네에 살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며 "면사무소 직원들이 준비한 택시를 타고 정신없이 넘어왔다"고 말했다.
삼덕1구 마을 총무 윤경예씨(66·여)는 당시 대피 방송을 하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고 이야기했다.
윤씨는 "면에서 전화가 오고 난리였지만 방송하고 어르신들을 대피시켜야 했다. 이후 침착하게 마음먹고 '마을회관으로 모이라'는 방송을 마쳤다"며 "그러나 밖으로 나가자 화염이 보였고 무서운 마음에 밭에 있던 분들을 잡아 끌어 택시에 태워 도망쳤다"고 기억했다.
이어 "어르신들이 기침도 하고 다들 너무 놀랐다"며 "시꺼먼 연기로 인해 낮인지 밤인지 구분도 못 할 정도 였다"고 덧붙였다.
경로당에 모인 대피 주민들은 오후부터 예정된 비 소식만 기다렸다. 건조한 날씨와 바람에 진화가 어려워 '산불 3단계' 대응단계까지 격상하자 불을 잠재울 수 있는 건 비뿐이라고 생각해서다.
정성화씨(70·여)는 "오후부터 비가 많이 온다는데 조금만 더 서둘러서 많이 내렸으면 좋겠다. 우리가 물이라도 떠다놓고 빌까 한다"며 "집은 피해가 없다고 들었지만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고 했다.
함평 산불은 인근 양봉장에서 쓰레기 소각 중 발생한 불씨가 인근 야산으로 연소 확대된 화재로 추정하고 있다.
주민들은 부주의한 쓰레기 소각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장판동씨(76)는 "마을에서 쓰레기 소각 금지 방송도 자주했다"며 "하지만 전국적으로 산불 발생 원인 대다수가 쓰레기 소각으로 지목되고 있는 만큼 조심하고 소각과 담배꽁초를 주의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함평 산불은 전날 낮 12시19분쯤 대동면 한 야산에서 불이 시작됐다. 오후 3시10분을 기준으로 산불 2단계가 발령됐지만 건조한 날씨와 강풍 영향으로 삽시간에 대규모 확산됐다. 오후 10시30분을 기해서는 산불 3단계가 발령됐다.
산불 이틀째에 접어든 4일 오전 5시 기준 진화율은 60%이며, 산불영향구역은 약 382㏊, 잔여화선은 7.4㎞다.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발화 지점 인근 공장 4동과 축사 2개소, 비닐하우스 2개소 등이 전소했다. 또 주민 43명이 백운경로당 등 경로당 3곳으로 대피했다.
pepper@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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