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김일성 지시? 희생자 유족 가슴에 대못 박는 말"

박혜연 기자 박상휘 기자 박동해 기자 이정후 기자 오현지 기자 2023. 4. 4.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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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5주년 후] ①양조훈 제주 4·3중앙위원 인터뷰
"50년간 '빨갱이' 누명 시달려…재심으로 무죄판결 속출"
양조훈 제주 4·3 중앙위원이 지난달 31일 제주시 오라동 자택 서재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4.1/뉴스1 ⓒ News1 오현지 기자

(제주=뉴스1) 박혜연 박상휘 박동해 이정후 오현지 기자 = "제주 4·3 희생자와 유족들은 이념적 누명으로 반세기 동안 억눌리고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과거 군사정권에서는 '4·3은 공산폭동이니 누구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통제해왔죠. 4·3 연구자들은 물론이거니와 4·3을 소재로 소설이나 시를 써도 연행, 구속시켰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을 씌웠지요."

올해로 75주년을 맞은 제주 4·3사건을 두고 이른바 '공산폭동론', '김일성 지시설' 등 이념적 색채를 덧씌우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30년 넘게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온 양조훈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약칭 중앙위원회) 위원은 지난달 31일 자택에서 뉴스1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양 위원은 "유족들은 가족이 억울하게 죽었어도 말 한마디 못 했고, 오히려 연좌제로 취업이나 해외여행에 제약을 받았다. 더욱이 '빨갱이'란 지독한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온 것"이라며 "4‧3의 진실이 속속 밝혀지면서 공산폭동론의 실체가 허구로 밝혀졌다"고 강조했다.

언론인 출신인 양 위원은 1988년 제주신문에서 4·3 특별취재반장을 맡으면서 4·3사건 실체 규명에 뛰어들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엄혹한 군사정권 하에서 침묵을 강요당했던 4·3희생자들은 6월 항쟁으로 인한 민주화 열기와 5·18 운동을 계기로 하나둘 어렵게 입을 열었다.

1989년 4월3일부터 제주신문에서 연재된 '4·3의 증언'(57회), 신문사 폐업 후 해직사원들이 창간한 제민일보에서 다시 연재된 '4·3은 말한다'(456회) 보도를 합치면 총 513회에 이른다. 무려 10년간 이어진 4·3 보도는 한국언론사 최장기 연재를 기록했고 채록된 증언자만 6000명이 넘었다.

이후 2000년 1월 여야 합의로 제정된 4·3 특별법에 따라 2003년 12월 정부가 발간한 진상조사보고서는 당시 4·3 사건에 대해 '북한 혹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등은 존재하지 않았고, 남로당 제주도당이 독자적 결정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은 이메일과 대면 인터뷰로 진행한 양 위원과의 일문일답이다.

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 감금된 제주 청년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1980년대 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4‧3사건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분위기는 어땠는지요.

▶1980년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제주도 폭동사건은 북한공산당의 사주 아래 일어난 남한 교란작전 중의 하나였다'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한때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군사정권 아래서 이런 표현 하나로 모든 것을 덮어왔죠.

1988년 제주신문(후에 제민일보) 4‧3 취재반장을 맡은 이래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재했습니다. 그런데 그 허상이 하나씩 깨어지기 시작하더군요.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설을 주장했던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은 "그건 자신의 글이 아니고, 중앙정보부에서 고쳐 썼다"고 털어놨고, 교과서 필자들도 "4‧3 연구를 못 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어요.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족들의 피해의식은 심각했습니다. 학계에서도 겁을 먹고 현대사 연구 기피현상이 있었고, 심지어 중앙언론도 이념 콤플렉스 때문인지 외면했지요. 그러니 두렵지만 우리라도 열심히 나서서 그 진실을 밝히자고 독려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일부 극우단체들은 4·3 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해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작성한 좌익 편향적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하며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4‧3특별법과 4‧3위원회 구성 내용 등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먼저 4‧3특별법은 여야 합의로 통과된 법률입니다. 그 법률의 절차에 의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부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진상조사와 보고서 심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위원회 위원 20명 중 8명은 국방장관, 법무장관, 행자부장관, 법제처장 등 정부 인사들이 참여했고, 민간인 위원 가운데도 국방부와 경찰 추천 인사들도 있었어요.

이런 구도에서 일방적으로 좌파 편향적으로 보고서가 작성하면 통과되겠습니까. 이념을 절대 가치로 여기는 일부 극우세력들은 4‧3의 본모습이 드러나며 세상 밖으로 나오자 그 꼴을 보지 못하겠다는 투였지요. 그들은 진상조사보고서를 무효화하기 위해 맹렬하게 헌법소원, 국가소송 등 법적인 투쟁을 벌였지만 모두 패소하게 됩니다.

1991년 경찰은 4.3추모제를 열겠다는 대학생과 시민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400명을 연행했다.(양조훈 위원 제공)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제기한 '김일성 지시설'을 비롯해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중앙당 지령설' 등이 극우단체나 유튜버 등을 통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들의 근거와 저의는 무엇일까요.

▶나는 지금도 태영호 의원이 국민의힘 최고위원 경선 과정에 제주에 와서 '김일성 지시설'이라는 폭탄 발언을 한 저의를 이해할 수 없어요. 더욱이 김일성을 대신해서 사과하다면서 무릎을 꿇는 제스처까지 하면서 말이죠. 그런 발언이 4‧3 희생자나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그리고 태영호 의원이 북한정권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까. 최고위원 선거를 하면서 극우세력의 결집과 지지를 얻기 위한 정략적 술수로밖에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극우단체에선 울고 싶었는데, 태영호 의원이 빰을 때려준 격이죠. 그들은 팩트보다는 감성적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최근의 현수막 퍼포먼스도 그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군부의 대부 격인 백선엽 장군, 전략통 김점곤 장군 등도 남로당 중앙 지령설을 부인하고 있어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북한이 1948년 8월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전국인민자대표대회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 김달삼(4·3 당시 무장봉기를 일으킨 남로당 제주도당 선동가)도 참석해요. 미국이 입수한 연설문을 보면 김달삼은 당시 해주 대회에서 "경찰과 서청(서북청년단)의 탄압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봉기를 했다"고 밝힙니다. 만약 4·3이 김일성 지시였다면 '영도자 지령에 의해서'라는 식의 표현을 쓰지 '자연발생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겠죠.

-극우단체에서는 5·10 선거 반대운동을 '건국 전쟁'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제주도에서 무장투쟁이 처음 시작한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1948년 2월 유엔(UN)에서 ‘한반도에서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그것은 소련이 반대하면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되는 거죠. 좌파만이 아니라 김구, 김규식 선생 등 민족 지도자들이 반대합니다. 통일신라 이래 고려, 조선까지 한반도는 하나의 나라였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분단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거죠.

이런 요동 속에 2월26일 전북에서 26개소, 3월1일 전남에서 10개소의 경찰관서가 습격을 당하죠. 미군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4‧3 봉기가 일어나기 이전인 2월과 3월에 본토에서 모두 239건의 경찰관서 습격사건이 발생합니다.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이 (5·10 선거 반대운동으로) 요동을 친 겁니다.

ⓒ News1 윤주희 디자이너
1948년 5·10 선거를 보이콧하기 위해 한라산으로 오른 주민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제주에서는 엄청난 민간인 희생이 있었는데 본토에는 왜 없었을까요? 본토에서는 가까스로 유효선거인 과반을 넘겨서 국회의원을 뽑았지만 제주도만 50%를 못 넘어서 국회의원을 못 뽑았습니다. 소위 '뚜껑'이 열린 미군정이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총사령관으로 파견했고, 브라운 대령은 한국 군인과 경찰을 동원해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다 잡아들이라고 명령합니다. 6주 만에 6000명이 잡혀 들어오는데 그 안에는 중학교 2학년도 들어갔어요.

-4·3 당시 앞장 서서 만행을 저질렀다고 알려진 서북청년단이 이번 4·3 추념일에 집회를 하겠다고 했는데요.

▶양심이 털끝만이라도 있었으면 그런 일을 못하죠. 서청은 제주도민들에게 악몽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편으로 서청에 대해 가련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들은 북한 정권에서 쫓겨 나와 남한에 맨주먹으로 내려온 사람들이죠. 반공 정신이 너무 투철한데 조병옥(4·3 당시 경무부장으로 진압 총책임자) 같은 사람이 이용한 겁니다.

정권은 그들을 부추기고 선동하고 제주도에 파견했지만 월급을 줬나, 식량을 줬나 아무것도 없었어요. 양심적인 서청단원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들은 '제주 사람들이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냥 젊은 사람이면 무조건 잡아들여 지서에서 매질을 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자기 아들을, 동생을 구명하기 위해서 쌀과 돈을 가져갔고 그것이 악순환이 됐습니다. 제주도민은 서청을 더 배척하고 서청은 더 악랄하게 제주 사람들을 탄압했죠. 쌀과 돈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닭과 돼지, 소가 됐고 여인 겁탈사건도 수없이 이뤄졌습니다.

-4·3은 오래된 역사이기도 하고 또 제주도민이 아닌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입니다. 이런 인식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4‧3은 비록 제주땅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벌인 냉전과 남북분단 상황에서 최초로 피해를 입은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법이 제정되어서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시기가 20여년밖에 안 되어서 아직도 우리 국민 가운데는 그 진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에 4‧3특별법이 개정돼서 희생자 1인당 9000만원씩 국가보상금이 지급되고 있고, 4‧3 당시 불법적인 재판에 의해 옥살이한 수형자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는 일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4‧3희생자유족회와 경찰 출신 모임인 제주경우회가 서로 손을 맞잡는 등 화해운동도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4‧3의 진실 그 자체뿐만 아니라 진실규명 과정과 화해운동 등을 소개하는 교육활동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4.3사건에 대한 추가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남은 조사 과제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 난제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를 꼽으라면 미군의 역할과 책임문제를 규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4‧3은 미군정 시기에 발생했고. 초토화의 진압과정에도 개입한 사실이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령 미국 학자들은 대량학살을 몰고온 초토화작전은 이승만 정권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나, 당시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이 초토화작전을 벌인 송요찬 연대장을 추천, 칭찬한 일이나 그런 작전에 동원된 장비, 무기, 총알 등이 모두 미군이 지원한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지요.

4년 전에는 뉴욕 UN본부에서, 지난해에는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4‧3 국제심포지엄이 열린 바 있습니다. 이런 행사에 참석한 미국 학자나 정치인 가운데도 한미동맹이 더욱 튼튼하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4‧3 같은 과거사도 풀고 가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6.23 재선거를 독려하기 위해 제주를 방문한 로버츠 장군과 경비대 참모들 (김정무 장군 소장, 양조훈 위원 제공)

■ 기획취재팀(박상휘 팀장, 박동해·박혜연·이정후 기자)

hypar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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