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들의 현실 앞에서, 학폭의 ‘해결’에 더 집중하자는 건 이상론일까[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기자 2023. 4. 3.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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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저학년 동화에서는 폭력 가해자가 뉘우치며 갈등 해결…고학년 동화·청소년 소설에선 ‘나’ 자신의 성장과 성숙한 관계맺음에 집중
SF 등 장르 문법으로 폭력을 ‘재현’하는 소설들도 현실을 ‘성찰’하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 많아…피해자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작품들 더 창작되길

최근 이슈가 된 학교폭력 관련 드라마와 사건은 어린이와 청소년 주변의 폭력에 대해 다시 살펴보게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살아가는 세계가 안전하길 바라지만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세계까지 침범하거나 되풀이된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안전을 가장 먼저 지켜주어야 할 가정, 보육기관, 교육기관에서 오히려 학대나 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2절 제6조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학교에서 어떤 폭력에 노출될 수 있으며 어떤 보호를 필요로 하는지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① 학생은 체벌, 따돌림, 집단괴롭힘, 성폭력 등 모든 물리적 및 언어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진다. ② 학생은 특정 집단이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에 기초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설하는 행위나 모욕, 괴롭힘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진다. ③ 교육감, 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체벌, 따돌림, 집단괴롭힘, 성폭력 등 모든 물리적 및 언어적 폭력을 방지하여야 한다.”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진다’는 문장이 다소 낯설기는 하나 조례를 읽어만 보아도 모든 차별과 폭력에서 학생을 보호해야겠다는 결의 같은 게 생긴다. 지극히 당연하게 지켜져야 할 일들이지만 그 옛날 학교는 그렇지 않았던 걸 떠올려 보면 조례 덕분에 학생들이 폭력으로부터 좀 더 안전하겠다는 안도감이 든다. 그런데 지난 2월14일 서울시의회에서 이 조례의 폐지를 요구하는 주민 조례 청구가 수리되었다니 앞으로 일이 주목된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살아가는 현실을 언제나 예민하게 살펴온 아동청소년문학은 폭력에 대해서도 오래전부터 이야기해왔다. 여러 폭력 양상 중에서도 특히 따돌림이나 집단괴롭힘 등 어린이와 청소년이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다. <내 짝꿍 최영대>(채인선, 재미마주, 1997)와 <양파의 왕따 일기>(문선이, 주니어파랑새, 2001)는 출간 당시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집단괴롭힘과 따돌림을 말한 저학년 동화로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널리 읽힌다. 스테디셀러의 이유에는 어린이가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문학 작품으로 접하며 성찰하게 만들려는 교육적 목적이 있겠다. 두 작품을 비롯해 동일한 주제를 이야기한 많은 동화에서는 주로 학교폭력을 작품 속에 어떻게 드러내고 해결했는지가 비평의 쟁점으로 논의됐다. 폭력의 재현이 폭력을 성찰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선정적인 묘사나 기술 자체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지, 문제 해결의 전망이 지나치게 낭만적이어서 복잡다단한 현실을 무화시켜 버리지는 않은지 등등. 문학 작품을 포함해 여느 영상, 공연 콘텐츠가 폭력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숙고하는 지점과 같다.

저학년 동화에서는 대개 따돌림이나 괴롭힘이 장난으로 무마될 수 없는 폭력이라는 사실을 가해자가 깨닫고 뉘우치며 피해자에게 사죄하면서 갈등이 해결된다. 이에 비해 최근 고학년 동화나 청소년 소설의 접근은 좀 다르다. 우선 하나의 방식은 폭력과 갈등을 해결하는 일보다 그 사건을 겪는 ‘나’ 자신에 집중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관심을 두는 것이다. 따돌림당하는 인물에게 친구가 생기기도 하지만 친구 없이도 충만하고 당당한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느끼며 친구에 연연하지 않는 길로 나간다.

체리새우: 비밀글입니다 황영미 지음 | 문학동네 | 1만1500원 | 2019

청소년 소설 <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황영미, 문학동네, 2019)는 중학생 다현이가 같은 반 은유를 따돌리는 그룹에서 벗어나 은유와 친구가 되는 가운데 자신의 내면까지 긍정하게 되는 이야기다. 다현이가 속했던 ‘다섯 손가락’ 친구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은유와 절대 말을 섞지 말 것을 암묵적으로 약속했지만 다현이와 은유가 같은 모둠으로 수행평가를 준비하게 되면서 관계가 변화한다. 은유와 가까이 지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첫 모둠 모임까지 빠졌던 다현이는 자신이 ‘다섯 손가락’ 친구들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보고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거기에는 은유의 영향이 있었다. ‘왕따’도 겁나지 않는다는 은유는 “어차피 우리 모두는 나무들처럼 혼자야. 좋은 친구라면 서로에게 햇살이 되어 주고 바람이 되어 주면 돼. 독립된 나무로 잘 자라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156~157면)라고 친구 관계를 바라본다. 다현이 역시 “나를 싫어하는 애들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싫어하더라고. 노력해도 그 애들의 마음은 돌릴 수 없어. (…)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에게만 신경 쓸 거야. 나를 좋아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으면 그냥, 내가 먼저 좋아할 거야”(179~180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하면 좀 어떤 사이 조우리·김중미·조규미·허진희·김해원 지음 | 낮은산 | 1만3000원 | 2023

최근 출간된 청소년 소설 앤솔러지 <하면 좀 어떤 사이>(조우리 외, 낮은산, 2023)도 때로 자신을 내어주고 때로 자신을 지키며 타인과 관계 맺는 다양한 방식을 섬세하게 이야기한다. 표제작 ‘하면 좀 어떤 사이’는 친구를 좋아하다가, 부러워하다가, 질투하는 관계들에 대해 한 발짝 거리를 두고 ‘그러면 좀 어때’라며 여유롭게 바라본다. 학교폭력 상황은 아니어도 복잡다단한 갈등 관계에 처했을 때 스스로 편해질 수 있는 마음의 자리를 마련한다. 타인이나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 지쳐 하며 ‘자존감’이나 ‘멘털’ 같은 단어를 종종 입에 올리는 요즘 청소년에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너무 나무라지 말라고 보듬어 주는 듯하다. “자존감 낮은 자신을 싫어하는 대신 차라리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싫어하자고. 그 말에서 느껴지는 높낮이를 싫어하자고.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에 끊임없이 키 높이를 시도하게 하는 그 단어를 우리 함께 싫어하기로 하자고.”(164면)

그럼에도, 학교폭력이라는 현실을 떠올리면 질문이 남는다. <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에서 ‘다섯 손가락’이 은유를 따돌린 행위는 그저 다현이 ‘다섯 손가락’에서 이탈하고 말면 사라지는 일인지. 은유가 ‘왕따’가 되는 걸 겁내지 않는 이유가 어차피 인간은 혼자라는 존재론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는 생존 전략이라면 이를 마냥 반기고 말 일인지. ‘하면 좀 어떤 사이’에서 주리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똑같이 따라 하며 비슷한 사진을 찍어 올리고 스터디 플래너까지 베끼는 계정을 사이버 폭력으로 보지 않고 내버려 두어도 되는지. 고학년 동화와 청소년 소설도 저학년 동화처럼 폭력이 사라져야 한다는 당위를 지닐 수는 없나. 10대의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을 꿈꾸는 일이 될까. 그렇다면 학교폭력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작품이라도 계속 창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학교폭력 상황과 친구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 상황을 좀 더 명확히 구분해 가면서 말이다.

청소년 소설에서 앞서 말한 작품들보다 심각한 수위의 학교폭력은 리얼리즘보다는 SF, 판타지, 호러 등 장르 형식이나 문법으로 이야기됐다. 청소년 소설이 학교폭력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즉 친구 관계의 갈등이나 낮은 수위의 폭력은 친구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나 자신을 찾아가는 리얼리즘으로, 높은 수위의 폭력은 장르로 이야기하는 게 보통이다. 장르 형식이나 문법을 이용하는 이유는 청소년 인물이 등장하고 청소년 독자가 읽는 텍스트에서 폭력을 재현하는 부담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죽이고 싶은 아이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1만2500원 | 2021

제목부터 강렬하고 섬뜩한 <죽이고 싶은 아이>(이꽃님, 우리학교, 2021)는 고등학교 1학년 박서은의 시신이 학교에서 발견되고 ‘절친’ 지주연이 용의자로 지목받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작품 중간에 여러 차례 삽입되는 방송 인터뷰는 서은과 주연을 보아온 다양한 인물들의 직설적인 대화체 문장을 통해 둘의 관계를 드러내고 탐문한다. 특정한 시간, 장소, 관계에서 그들을 보아왔을 뿐인 제한된 목격자들의 견해는 저마다 다르다. 다만 서은의 죽음 이후 밝혀지는 서은과 주연의 관계가 ‘절친’이 아니라 ‘계약 노예’라고 할 만한 이용, 집착, 의존의 관계였다는 점을 알려준다. 둘의 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증언들과 결말에 드러나는 서은과 주연의 마지막 대화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층위를 낱낱이 파헤친다. 하지만 서은을 살해한 범인을 찾는 전체 서사의 흐름 속에서 폭력이라는 주제는 단지 서사의 요소로 기능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SF 등의 장르 형식과 문법으로 학교폭력을 말하는 다른 청소년 소설들 역시 폭력을 생생하게 드러내고는 있지만 현실의 폭력을 내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현실을 우회하며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운문소설 <롱 웨이 다운>(제이슨 레이놀즈 지음, 황석희 옮김, 밝은세상, 2019)과 이 책을 그래픽노블로 만든 같은 제목의 책 <롱 웨이 다운>(제이슨 레이놀즈 글, 대니카 노프고로도프 그림, 전하림 옮김, 에프, 2022)은 열다섯 살 윌이 거리에서 살해당한 숀형의 복수를 위해 총을 들고 나선 순간을 그린다. 서사의 핵심은 총을 허리춤에 꽂고 집에서 나온 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서 로비 층까지 도착하는 1분7초간에 일어난 일이다. 매 층마다 엘리베이터가 서고 사람들이 타는데 그들은 모두 윌이 알고 있거나 윌을 아는 이들이며 총기로 살해당한 이들이다. 윌은 죽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친구 대니를 제외한 다른 이들 모두가 누군가를 살해하고, 살해당한 고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윌은 아버지가 마크 삼촌의 복수를 위해 누군가를 살해했는데 실상 진범을 오인했다는 걸 듣고 충격을 받는다. 숀형의 죽음을 복수하려는 윌, 마크 삼촌의 죽음을 복수한 아버지의 동일한 고리의 중복은 폭력이 계속 폭력을 낳는다는 진실을 엄중하게 보여준다. 여덟 살 때 놀이터에서 놀다 무고하게 희생된 대니가 “그런데 만약 총알이 빗나가면?”이라고 윌에게 질문하는 장면 또한 반복되는 폭력과 희생을 상기시킨다.

지금까지 여러 콘텐츠에서 총기 사고로 희생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보았지만 어른이 아닌 어린이와 청소년 독자에게 이토록 선명하게 총기로 인한 폭력을 이야기하는 책은 드문 것 같다. 운문소설 <롱 웨이 다운>이 뉴베리 아너상을, 그래픽노블 <롱 웨이 다운>이 케이트그린어웨이상을 수상하며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이기도 하겠다. 이 작품은 엘리베이터가 로비 층에 도착하는 1분7초간 죽은 자들을 만난다는 장르적 설정을 지니면서도 현실 세계의 폭력에 희생되는 이들과 폭력의 악순환을 진지하게 전한다. 장르 문법으로 파헤쳐진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폭력은 서사만 남긴 채로 휘발되지 않는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경험하는 이 세계의 폭력을 우리 동화와 청소년 소설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더 생각해 보게 한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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