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 이겨낸 지리산…비밀은 ‘빼곡한 활엽수림’

김기범 기자 2023. 4. 3. 21: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건조한 날씨 탓 전국 곳곳에 산불
큰불에도 ‘피해 최소’ 지리산 주목
국립공원 지정 이후 자연적 조성
“다량의 물 함유, 침엽수보다 강해”
홍성 산불 이틀째…쉴 새 없는 진화작업 충남 홍성 산불 이틀째인 3일 오후 헬기가 진화작업을 하고 있다. 전날 홍성군 서부면 중리에서 난 산불로 인근 주택 30채를 비롯해 창고와 기타 시설 등 건물 62채가 소실된 것으로 소방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연합뉴스

참나무, 신갈나무 등 활엽수들은 봄을 맞아 푸른 잎을 틔우고 있었고, 진달래와 벚나무 등은 만개한 꽃을 자랑했다. 불과 19일 전 축구장 127개 면적에 해당하는 삼림을 태운 산불이 일어났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리산 낙엽활엽수림의 생명력은 이미 산불을 이겨내고 있었다.

지난달 30일 정인철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국시모) 사무국장과 함께 찾은 경남 하동 화개면 지리산국립공원 대성골의 산불 피해지역은 언뜻 보면 대형 산불이 났던 곳 같지 않았다.

피해지역을 휩쓴 산불이 수관화(樹冠火)가 아닌 지표화(地表火)였던 때문에 주로 활엽수로 이뤄진 숲의 구성원들은 하룻밤 새 100㏊ 넘는 면적을 태운 대형 산불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한 모습으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수관화는 나무의 가지나 무성한 잎을 태우며 지나가는 산불, 지표화는 땅에 가까운 잡초·관목·낙엽 등을 태우는 산불이다.

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이번 지리산 산불의 피해가 적었던 이유로 1967년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이후 자연적으로 조성된 활엽수림을 지목한다.

실제로 이날 탐방로를 따라 광범위한 피해지역을 돌아본 결과 참나무 등 활엽수들은 아래쪽 껍질만 그을린 정도로 피해가 그쳤던 반면, 피해지역 능선부에 자리 잡은 소나무들은 모두 산불을 이겨내지 못하고 불에 탄 채 죽어 있었다. 소나무에서 불과 몇m 떨어진 곳에서는 참나무가 신록을 보일 준비를 하고 있어 대조적이었다.

지난달 29일 현장을 둘러본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 등 전문가들은 이번 산불이 규모는 컸지만 활엽수 윗부분까지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으며 지표화 형태로 조릿대 등 아래쪽의 풀을 태우면서 진행된 산불이라고 설명했다. 능선부의 침엽수림에서 일부 강한 산불로 인한 피해도 있었지만 대부분 낙엽이 타는 정도로 활엽수 피해는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임도 통한 진화 한계, 자연림 통한 예방이 우선

화마 이겨낸 지리산 가보니

지난달 11일 일어난 산불은 민가, 도로변에서 가까운 지점에서 시작돼 능선을 타고 번져갔지만 계곡을 만나면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고, 다음날 내린 비로 완전히 꺼졌다. 소나무 위주 침엽수림이었다면 줄기나 가지 등이 타면서 계곡물을 넘어가 피해면적이 더 넓어졌을 텐데 활엽수 위주의 숲이 조성돼 있었기 때문에 피해면적이 생각보다 적었고, 산불 강도도 높지 않았다.

홍 교수가 위성 영상을 통해 분석한 결과를 보면 산불 강도가 낮은 지역이 전체의 80%를 차지했고, ‘매우 높음’ 지역은 없었다. ‘높음’에 해당하는 지역은 전체 산불 피해면적의 3%에 불과했다. 홍 교수는 “산불 강도가 낮았던 것은 해당 지역의 사면부 식생 대부분이 자연적인 숲의 발달에 의해 소나무림이 쇠퇴하고 낙엽활엽수림으로 발달하는 과정의 숲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위적 간섭이 없어 활엽수의 밀도가 높은 덕분에 숲 내부 바람이 세지 않아 산불이 지표화가 돼 서서히 이동하다가 능선부의 소나무숲에 다다라서야 수관을 태운 것으로 확인됐다”며 “앞으로 소나무 피해가 발생한 지역은 빠르게 낙엽활엽수림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지리산 산불이 ‘활엽수림이 산불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다’는 논문이나 학술서적 속 지식을 실제 증명한 사례라고 입을 모았다. 다량의 물을 품어 ‘물기둥’이나 다름없는 활엽수가 건조한 곳에서 잘 자라는 소나무에 비해 불에 강하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가깝다. 그래도 자연적으로 조성된 활엽수림이 대형 산불마저 이겨내는 사례는 드물다. 수십년 동안 사람이 숲에 손을 대지 않으면서 활엽수림이 조성된 국립공원에서는 큰 산불이 일어난 사례 자체가 많지 않다. 이번 산불의 원인은 주민들의 실화로 추정된다.

지리산 산불을 계기로 ‘국립공원 임도 설치’에 대한 논란이 다시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산불이 발생한 뒤 산림청은 국립공원이라 임도가 없는 탓에 야간 진화작업이 어려웠고, 피해면적도 컸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지난달 8일 발생한 경남 합천 산불은 임도 덕분에 신속한 진화가 가능했다며 국립공원에도 임도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리산 현장을 돌아본 뒤 방문한 합천 산불 피해지역의 소나무숲은 잘 갖춰진 임도가 무색하게도 전멸에 가까운 상태였다. 전문가들은 산림청 주장과 달리 지리산과 합천 산불은 불이 난 뒤 임도를 통한 진화를 시도하는 것보다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숲을 통한 예방이 더 우선임을 나타낸다고 지적했다.

산림청은 산사태 위험 등을 이유로 지리산 피해지역 복구작업과 임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 역시 반대하고 있다. 현장을 둘러본 박석곤 순천대 조경학과 교수와 최윤호 백두대간숲연구소 소장은 공통적으로 “표층부만 불에 탔을 뿐 조릿대 등의 뿌리가 토양층 내에 잘 보전돼 있어 산사태 우려는 적다”고 밝혔다.

실제 현장에서 살펴본 피해지역 토양 내에는 빽빽하게 얽히고설킨 조릿대 뿌리 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지리산 산불은 최근 10년 사이 국립공원에서 난 산불 가운데 최대 규모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