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영의 세상만사 <1>] 사우디가 만드는 새로운 질서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2023. 4. 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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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빈 살만(왼쪽 두 번째)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사진 블룸버그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가 중국의 중재를 통해 이란과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지역의 라이벌이자 영원한 앙숙일 것 같던 이란과의 관계 정상화 합의가 워싱턴이 아닌 베이징에서 이뤄졌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미국은 원론적으로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강화하고 압박의 수위를 높이던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허를 찔렸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사우디는 최근 일련의 결정을 통해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강조하고 자국의 독자적인 노선을 과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의 원유 증산 요청 및 러시아에 대한 제재 합류를 거부한 것이다. 대신 사우디는 고위 관계자를 모스크바에 보내 양국 간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우호적임을 만방에 과시했다. 언제나 미국의 든든한 우방이었던 사우디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공학박사, 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

사우디 변화의 핵심 빈 살만 왕세자

사우디의 변화 핵심에는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가 있다. MBS는 서방의 시각에서 보면 예측 불가능하며 모순적인 인물이다. 종교의 역할을 축소하고 여성의 권리 확대를 추진하는 모습은 진보적 개혁가다. 하지만 국내 잠재적 반대 세력에 대한 강압적 탄압과 척결을 지속하는 폭력적 군주이기도 하다. 대외적으로는 이슬람 수니파 수장 국가로서 라이벌인 시아파 국가인 이란의 세력 확대를 봉쇄하기 위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미 아랍 국가들을 동원해 예멘 내전에 개입해 오랫동안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또 친이란적인 입장을 보이던 카타르에 대하여 동맹국을 동원, 단교와 더불어 군사적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막대한 비용과 인명 피해에도 불구하고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동맹국 사이에 사우디와 MBS의 능력과 판단에 대한 의구심이 확산했다. 21세기 들어 중동에서 사우디의 지위와 위상은 이란 및 튀르키예(옛 터키)의 적극적 행보에 밀려 상대적으로 위축됐는데 이를 만회해 대내외적으로 위상을 높이고자 했던 시도는 상당 부분 실패했다.

MBS는 대내적으로 변화를 통한 국민 지지를 이끌어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왕국이니 선거 결과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왕국인 만큼 국민의 모든 것을 챙겨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는 것이다. 석유 시장에서 사우디의 경쟁력은 압도적이다. 매장량은 세계 2위 수준이며,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 가운데 매장량 대비 생산량 비중이 낮아 장기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점 역시 강점이다. 하지만 사우디의 내부적 고민은 급속한 인구 증가에 있다.

사우디의 인구는 약 3341만 명인데 1950년 312만 명, 1970년 584만 명, 1980년 969만 명과 비교해보면 인구가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복지 비용뿐만 아니라 물, 전력 및 이동 수요 확대에 따른 석유 소비도 급증하고 있다. 현재 추세대로 증가할 경우 2030년대에는 사우디 국내 석유 소비량이 수출량을 초과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 감소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사우디는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2년 MBS의 방한 과정에서 유명해진 네옴(NEOM) 신도시는 국민에게 새로운 주거공간을 제공하고 동시에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경제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네옴 신도시 이외에도 사우디가 자국 내에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전기자동차 제조업체를 건설하며 재생에너지의 대규모 확충을 꾀한 것은 다 같은 맥락이다.

경제구조의 전환과 성장을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우디로서는 예멘 및 시리아 내전 등에서 발을 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일방적인 철수는 체면을 크게 잃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런 사우디의 입장을 눈여겨보고 있던 이라크 그리고 오만 등 주변국은 2022년부터 이란과 대화를 주선하면서 상당 부분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중동의 맹주를 자처하는 사우디 그리고 이란 모두 중소 국가의 중재를 통해 타협한다는 모습은 내키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공은 중국에 넘어갔으며, 중국의 중재하에 양국이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게 된 것이다. 즉 중국이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기보다는 사우디 그리고 이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양측이 중국을 중재자로 내세우게 된 셈이다. 중국 역시 이러한 구도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 주도의 양자 합의’라는 모양이 만들어졌다.

미국·중국과 관계 재설정하는 사우디

사우디는 독립 이후 미국과 안보 및 안정적 석유 수급을 위해 협력해왔다. 하지만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 이후 미군이 중동 지역에 직접 주둔하면서 이러한 관계는 위협받게 됐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을 때 상호의존성이 극대화됐지만 미국이 중동에 직접 개입하면서 사우디로서의 입지와 역할은 축소된 것이다. 9·11테러 이후 이라크 전쟁과 미국의 철군은 이러한 사우디의 불안을 더욱 극대화시켰고, MBS가 상징하는 새로운 사우디는 미국에 대한 일방적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화를 꾀하게 됐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이탈은 여전히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사우디로서는 너무 큰 도박이기 때문에 사우디는 우선 역내 국가 간의 타협과 관계 정상화를 통해 미국의 개입 필요성을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중동 지역의 강국인 이란 그리고 튀르키예 모두 중동 지역에서의 미국 영향력 축소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사우디의 이런 시도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의 역할이다. 사우디는 1990년대부터 중국제 무기를 일부 도입하면서 중국과의 전략적 관계 형성을 시도해왔다.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 이란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이자 중국은 이란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긴밀하게 협력했다. 이와 같은 중국의 움직임은 사우디로서는 상당히 껄끄러웠지만 사우디는 중국에 대한 접근을 강화해 우호관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2022년 12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우디 국빈방문으로 이어졌다. 사우디는 중국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중동 내 세력 균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냈으며, 미국과 관계에서도 중국이라는 레버리지를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최근 사우디는 미국과의 관계 재설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 대등한 입장임을 강조하고 사우디의 독자적 영향력을 인정해달라는 입장인 것이다. 미국을 배제하기보다는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지원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전기차 제조의 경우도 중국이 아닌 미국 업체와의 제휴를 선택했으며, 사우디가 추진하고 있는 민간 원자력 개발에서도 미국의 지원과 참여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미국으로서는 사우디의 요청과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사우디가 중국 또는 러시아에서 필요한 것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우디의 요구에 대해 수용 여부를 고심하고 있다.

사우디의 독자적인 행보 강화는 많은 것을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되지만, 사우디의 의도대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다. 중동이란 지역은 특정 세력이 해결책을 강요하려고 시도할 경우 이에 불만을 품은 다른 세력들이 결집해 반대 동맹을 형성하고 반격에 나서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의 독자적인 행보는 세계가 과거와 달라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대 세력이 존재하고 있지만 냉전 시기와는 달리 지역적 단위의 세력들이 나름대로의 독자성과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형태인 것이다. 당연히 국가 간의 관계는 복잡다단해지며 예측이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 역시 양자 간 선택과 일방적인 줄서기가 아닌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적인 판단과 행보가 필요한 상황이다. 사우디의 행보와 중동의 변화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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