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with 교회 김양원 목사 “제가 장애인인 이유…그들을 도우라는 하나님 소명”

이대현 기자 2023. 4. 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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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저를 장애인으로 창조한 건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을 도우라는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라남도 목포에서 1시간가량 배를 타야 도착하는 어느 외딴 섬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이가 있다.

2살 무렵 갑작스럽게 소아마비 진단을 받은 그는 학교에서 소외되고, 심지어 마을 사람들에게도 외면 받았다.

그런 그가 훗날 200명이 넘는 장애인을 돌보는 all with 교회 목사님이자 신망애복지재단 대표이사가 된다. 김양원 목사(68)가 그 주인공이다.

김 목사는 성인이 되고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 곧바로 공무원을 준비했다. 하지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어디에서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았고, 김 목사는 방황의 시기를 겪다 하나님을 만났다.

때마침 그는 길을 걷다 우연히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을 마주쳤다. 이에 김 목사는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절뚝거리며 장애인 곁으로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이때 김 목사는 깨달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장애인으로 창조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을 도우라는 소명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후 그는 1981년 2월부터 4년간 서울 소재 13평짜리 판자집에서 갈 곳 없는 장애인들을 돌보며 함께 생활했다. 

배추, 생선 부스러기 등을 주식으로 삼을 정도로 대단한 의지였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진 마을사람들에 의해 4번이나 쫒겨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 목사는 구리의 한 500여평의 부지 비닐하우스로 거처를 옮겼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보살피던 장애인 120여명의 얼굴에 웃음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의 보금자리였던 비닐하우스가 불에 타면서 순식간에 잿더미가 됐다. 큰 위기였지만 다행히도 지자체의 도움을 받아 1990년 8월 무사히 남양주에 재정착했다.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김 목사는 끊임없이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과 노인들에게 손길을 뻗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소문이 널리 퍼져 그를 찾는 장애인들이 많아질수록 봉사자, 후원자도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 결과, 지금의 신망애복지재단이 생겼다. 현재 복지재단에서는 장애인 200여명, 직원 150여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복지재단 휘하에 20개의 기관과 직원 200명이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을 돌보고 있다.

이 밖에도 김 목사는 복지재단을 통해 매달 노인 150여명을 초청해 잔치를 열고 있다. 잔치에서는 식사, 선물도 주며 장애인들과 노인들이 왁자지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이 웃을 때 김 목사는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34년 동안 쉬는 날 없이 도움만 주고 있다. 김 목사는 “장애인 장남을 둔 부모님이 고생 속에 살다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효도라는 것을 해보지 못했다”며 “장애인과 노인들에게 효도하며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천국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말씀드리며 떳떳하게 서 있고 싶다”며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쓰러질 때까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며 살겠다”고 말하며 미소지었다.

이대현 기자 lida@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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