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엉 주석이 친중이라 투자가 우려된다고?[가깝고도 먼 아세안](8)
지난 3월 2일 보 반 트엉(Vo Van Thoung) 신임 베트남 국가주석이 취임하자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VOA·Voice Of America)를 필두로 미국과 일본 언론은 베트남이 친중 정권이 돼 해외 투자자들이 우려하고 있다고 연일 보도했다. VOA는 1999년까지 미국 해외정보국 (USIA) 소속이었던 미국 정부의 정책과 외교 방향을 홍보하던 미디어로 현재도 미국 정부 출연 기관이다. 대외적으로는 독립된 편집권을 가진 언론이라고 하지만 실상 VOA의 보도는 미국 정부와 같은 시각으로 미국은 베트남의 친중 정책 선회를 우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미국이 베트남 신임 주석을 친중파라 인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미국이 트엉 신임 베트남 국가주석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트엉 주석은 베트남 공산당에서만 계속해서 일을 해왔다. 대외 접촉이 상대적으로 적어 베트남 내에서도 트엉 주석의 성향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세계 최고의 정보력을 갖춘 미국인데 설마 틀리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상은 미국 내에 한반도 전문가가 없다는 이야기마저 지금도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게 현실이다. 미국의 절대적 동맹관계이자 세계 8대 경제 규모를 갖추었고 세계 7위의 국방력을 갖춘 선진국인 대한민국인데도 그렇다. 심지어 미국 내 일본이나 중국 전문가들이 동아시아 전문가라는 직함으로 일본과 중국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한반도 정세를 판단하는 바람에 한국은 번번이 손해를 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에 제대로 된 베트남 전문가가 과연 있을까 의문이다.
‘누구 편에도 서지 않는’ 외교 원칙
베트남에서 활동하는 국내 언론 특파원들이나 베트남 정계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은 트엉 베트남 국가주석이 보수파일 수는 있으나 친중파는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주석이 누가 되건 베트남 외교 정책의 근간인 ‘어느 누구 편에도 서지 않고’, ‘모든 외교 활동은 국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정책은 바뀌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인다. 2022년 10월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이 확정되자마자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응우옌 푸 쫑 서기장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최근 베트남과 미국이 정치·경제·군사 측면에서 급격히 가까워진 데 불안을 느낀 중국 다독이기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국 국경이 차단돼 연간 50억달러나 줄어든 중국으로의 농산물 수출이 쫑 서기장의 방중 직후 재개됐고, 베트남 동해(남중국해)에 치솟던 군사적 긴장감도 한풀 꺾였다. 베트남은 중국과 관계를 푸는 정도의 움직임만으로도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취할 이득이란 이득은 다 챙겼다. 베트남으로선 당연히 해야 할 외교를 한 것인데, 이를 두고 친중이라 하는 건 무리다.
이러한 베트남 내부 사정을 모른 채 외신 내용만으로 한국 언론과 일부 전문가들은 베트남이 친중 정부가 됐으니 한국 기업들은 중국에서 당한 일을 베트남에서 똑같이 당하지 말고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와 같은 새로운 곳으로 투자처를 옮겨야 한다는 섣부른 주장을 내놓는다. 필자 역시 아세안에서 유독 베트남에 한국 기업과 자본이 지나치게 집중돼 있기 때문에 투자처를 다각화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십분 공감한다. 하지만 아세안의 한류 발상지이자 지난 30년간 한국 기업들이 일구어 놓은 친한국 시장인 베트남의 가치는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일본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아세안 시장의 전체적인 상황을 알면 베트남이 우리 한국에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베트남의 소중한 가치 명확히 알아야
아세안 지역은 1960년대부터 일본 기업들이 집중적으로 투자하면서 일본의 전진기지가 된 지 오래다. 아세안 주요 5개국의 자동차 시장점유비율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자동차들의 인도네시아 시장점유율은 90.5%, 필리핀에서는 83.9%, 태국에서는 79.9%다. 한국 자동차 비율은 10% 미만으로, 인도네시아에서는 3% 수준인데 베트남에서는 현대기아자동차가 35.4%이다. 단일 자동차 브랜드로는 현대차가 1위 도요타를 바짝 쫓고 있다. 이처럼 베트남은 아세안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한국보다 적은 유일한 곳이다.
일본은 아세안에 다양한 원조와 차관 제공 등을 통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 중이다. 그중에서도 최근에는 베트남에 집중하고 있다. 일본은 베트남의 수질 개선, 의료, 재생에너지 지원, 인공위성 연구원 양성부터 제작 발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지원하는 등 공을 들이고 있다. 일본의 베트남 지원에 대한 단편적인 사례가 있다. 577억엔(5800억원)이 들어간 하노이 국제선 신공항 터미널과 1688억엔(1조7000억원)을 쏟아부은 호찌민 지하철 1호선 공사 모두 일본 정부개발원조(ODA) 자본으로 지어졌다. 한국과 일본의 ODA 자본을 비교해보면 일본의 베트남에 대한 지원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1년부터 2021년까지 21년간 일본국제협력기구인 자이카(JICA)를 통해 일본이 ODA 자본으로 베트남에 투자한 금액은 누적 238억달러(약 31조원), 연평균 11억3000만달러(약 1조4700억원)에 이른다. 이에 비해 같은 기간 우리나라는 한국국제협력기구 코이카(KOICA)를 통해 24억5000만달러(약 3조2000억원)를 지원했다. 연간 평균으로 치면 1억1600만달러(약 150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일본은 베트남에 한국의 10배를 지원하고 있다.
일본은 외교적으로도 베트남을 적극 공략 중이다. 스가 전 총리가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지로 선택한 곳이 베트남이었다. 현 기시다 총리 역시 취임 이후 가장 먼저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은 인적자원 개발 장학금 프로그램인 JDS(Japan Develop scholarship)를 운영하고 있다. 24~39세에 이르는 개발도상국의 젊은 공무원들을 선발해 왕복 항공권은 물론 일본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칠 수 있는 등록금, 월 생활비, 기타 수당을 포함한 전액을 지원한다. 아세안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싱가포르와 브루나이를 제외한 8개국이 해당 장학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베트남에는 2000년 처음 도입된 이래 올해까지 모두 816명이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았다. 이는 아세안의 젊은 엘리트 공무원들이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도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게 하고, 선진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갖는 친일파로 양성하기 위함이다.
이런 일본의 장기적이고 치밀한 대규모 지원에도 불구하고 아세안에서 유일하게 베트남에서만 한국의 영향력이 더 강해 일본은 답답해하고 있다. 한국은 이런 베트남을 아세안 거점 기지로 삼아 다른 아세안으로 확장 진출하는 전략을 짜야 한다. 미력하나마 이 글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지난 30년간 한국 기업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일구어 놓은 베트남 시장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호찌민 | 유영국 「왜 베트남 시장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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