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가져올게, 기다려”…6살 아이는 무덤가에서 사흘 울었다
4·3 후유장애인 양수자의 ‘4·3 트라우마’ 앓이
온 가족 몰살되는 현장 목격하고 자신도 다쳐
눈에 훤해요. 6살에 그 광경을 직접 보고 당했는데 어떻게 잊겠어요? 눈에 박혀 있어요.
3월27일 제주시 일도2동 집에서 만난 양수자(81)씨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숨이 차오른다. 그에게 4·3은 75년 전의 죽은 과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다. 가족의 몰살을 목격한 6살 아이는 평생 숨이 턱턱 막힌 채 살아왔다.
깨어나면 그날의 일들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텔레비전에서 4·3 소식이 들리기만 하면 심장이 떨려온다. 2020년 3월 뒤늦게 4·3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아 “이제 조금은 살 것 같다”고 하지만, 여전히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는 눈물도 말라버렸어요. 여러 사람이 모인 곳은 외면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생각하면 숨이 콱콱 막혀요. 살아온 것 자체가 너무 숨이 막혔어요.”
1949년 2월3일. 군 토벌대가 노형리 외곽 소나무밭(지금의 제주고 부근)에 얼기설기 엮은 양씨 가족의 피신 움막에 들이닥쳤다. 지금은 제주 최고의 번화가가 된 노형리는 ‘리’ 단위에선 제주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이다. 제주4·3평화재단이 펴낸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1>(2019)을 보면, 제주읍 노형리는 사망자 370명, 행방불명자 156명, 수형자 11명, 후유장애자 1명 등 538명의 4·3 희생자를 냈다.
노형리는 1948년 11월19일과 20일 사이 9연대 군인들에 의해 초토화되기 시작됐다. 계엄령이 내려진 지 이틀 만이었다.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이 죽어갔다. <노형동지>(2005)는 노형리 6개 자연마을 가운데 양씨 가족이 살던 정존마을에 4·3 무렵 61가구 260여명이 거주했으나, 이 가운데 12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희생된 이들 가운데는 양씨의 이모(어머니 여동생) 일가족도 있었다. 이모네는 시할아버지부터 자식까지 4대가 한꺼번에 몰살당했다.
양씨 가족이 살던 정존마을 초가도 불에 탔다. 할머니(김사일·당시 64살), 아버지(양우빈·27살)와 어머니(현경옥·29살), 언니(양정자·10살), 여동생(양신자·4살), 그리고 생후 2~3개월 된 남동생 등 모두 7명이 한집에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초가가 불탄 뒤 1948년 12월10일 밭에서 일하다 토벌대의 총에 맞아 숨졌다.
갈 곳이 없게 된 여섯 식구는 정뜨르비행장(제주공항) 인근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그러나 할머니의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동네 주민들이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피난 온 양씨 가족에게 산에서 내려온 ‘산폭도’라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집이 불타기 전 미리 왔으면 됐는데, 늦게 왔다는 게 이유였다.
추운 겨울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 어디서 군경이 나타나 잡아갈지 몰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양씨와 언니는 걷고 동생들은 업거나 안고 집안 소유의 노형리 외곽 소나무밭으로 갔다. 양씨는 “아버지가 아무리 사정해도 산폭도라며 들여보내 주지 않아 우리 소나무밭까지 갔다. 그곳에 움막을 지어 살았다”고 말했다. 주변의 소나무를 베어 얼기설기 엮어 바람을 피할 정도의 조그만 움막이었다. 그 안에서 여섯 식구가 하루하루를 살았지만,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겨울의 한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기보다 더 무서운 일이 찾아왔다.
1949년 2월3일 낮, 토벌대가 움막에 들이닥쳤다. 아버지가 잠시 나간 사이였다. 그날의 일을 6살 아이는 눈으로 보고 기억했다. 그리고 평생 그 기억의 고통에서 달아나려 했다. 달아나려 할수록 기억은 더 그를 옥죄어왔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쏘았어요. 총으로 쏴서 맞지 않으니까 세 번을 쏘았어요. 세 번째 쏘았을 때는 총알이 목에 맞았습니다. 목에 맞으니 피가 튈 거 아닙니까? 피가 팍팍 튀면서 우리 몸이 피범벅이 됐어요.”
토벌대는 총으로 쏘고 칼로 찔렀다. 언니는 다리에 총을 맞아 눈 위에 나동그라진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토벌대는 언니가 죽은 줄 알고 그냥 방치했다. 아버지가 돌아온 뒤 언니를 치료하려고 인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으나, 그 집도 그날 저녁 불에 탔다. 언니의 주검은 찾지 못했다. 여동생은 움막 안에 앉은 상태로 죽어 있었다.
양씨는 왼쪽 옆구리에 칼을 맞아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눈을 떠 사방을 둘러봤다. 더 큰 충격이 다가왔다. 생후 2, 3개월밖에 안 돼 이름도 짓지 못한 남동생이 목이 잘린 채 움막 안에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양씨는 그때 토벌대가 한 말을 기억한다. “갔다가 와서 살아 있으면 다시 죽여버리겠다.”
“그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지금도 옆에서 말하는 것 같아요. 우리 언니, 동생들, 어머니 죽이는 것을 어린 나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까 그 장면들이 지금도 훤하게 보이는 거예요. 아버지도 독자, 남동생도 독자였어요.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얼마나 귀여웠겠어요?”
2월3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가족의 비극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울부짖으며 죽은 아내와 자식들의 주검을 수습한 아버지는 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칼에 찔린 딸만이라도 살려야 했다. 아버지는 어린 양씨를 업고 겨울철 그 움막에서 삼성혈까지 눈 내린 길을 걸어 내려왔다. 직선거리로는 6㎞가 채 되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3시간은 족히 걸어야 했던 거리였다. 그것도 언제 어디서 토벌대와 서북청년단이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삼성혈 옆 무덤가에 다다르자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말했다.
“이불 가졍 오켜. 이디 이시라.”(이불을 가져올 테니 여기 있어라) “아버지, 나도 가젠(갈래).”
딸이 보채자 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같이 잠을 자는 척했다. 제주의 무덤은 방목한 소나 말의 출입을 막기 위해 대개 장방형의 돌담(산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양씨가 깨어나 보니 옆에 있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와는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아이는 더럭 겁이 났다. 매섭게 추운 날씨였다. 조그만 차롱(대바구니)에 삶은 보리쌀과 게다짝(일본 신발)에 할머니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아이는 그 산담 안에서 사흘을 밤낮 울었다. 눈이 내리고 또 내렸다. 추위로 몸은 시커멓게 변해갔지만, 혼자 산담 옆에서 사흘을 버티며 울었다. 아버지가 올 것 같아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아무도 없는 무덤가 산담 옆에 앉아 울어대는 아이. 울음은 추운 겨울의 바람소리 사이를 타고 퍼져나갔다. 그러다 울음이 그치면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저승과 이승의 어디쯤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감시막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감시초소를 지키던 사람이 찾아왔어요. 짐승 소리인지, 사람 소리인지 무슨 소리가 난다고 찾아온 거예요. 와서 보니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하도 울어대니 몸이 붓고, 시커멓게 변해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모습이었던 거예요.”
주민들은 게다짝에 쓰인 주소를 보고 아이를 할머니 집으로 데려다줬다. 할머니 집에서 양씨는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고, 이유 모를 갖은 구박을 받았다. 차라리 보육원에 맡겨졌으면 고생을 덜 했을 거라고 했다. 식사도 눈치를 보며 해야 했다.
“밥을 먹으면 많이 먹는다고 구박했어요. 남박세기(나무바가지)에 밥과 국을 퍼서 고팡(창고)에 숨겼다가 할머니가 외출하면 그걸 씹어먹지 않고 꿀꺽꿀꺽 삼켰어요. 지금도 밥을 5분 이상 먹지 못해요. 그렇게 살았어요.”
7살 때부터 아이는 밭에 검질(김)매러 다녔다. 혼자만 가서 조팥(조밭) 검질을 맬 때가 훨씬 편했다. 혼자서 콩을 갈 때는 덥거나 지치면 드러누워서 쉬기도 했지만, 할머니와 함께 가면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양씨는 “콩밭 검질맬 때는 더울 때다. 더워서 일어서면 골갱이(호미)로 와싹 때려. 일어서면 버릇 난다면서 일어서지 못하게 말이야. 그렇게 일어서서 바람 쐬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기절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은 부럽지 않았다. 부럽다는 것은 사치였다. 하지만 글을 배우고 싶었다. 양씨의 표현에 따르면 ‘눈이 벨라지게(벌겋게)’ 배우려고만 했다. 정뜨르의 한 교회에 다녔다. 10살 무렵부터 다닌 교회는 결혼하기 한 해 전인 19살까지 다녔다. 할머니는 “여자가 밥할 줄만 알면 되고, 솥뚜껑만 열 줄 알면 된다”며 다니지 못하게 했지만 용케도 다녔다.
할머니는 새벽 3~4시가 되면 깨워 밥을 짓게 했다. 쇠먹이러 갔다 오고, 구루마(마차)를 끌고 가 촐(꼴)을 실어다가 집에다 놔둔 뒤 양씨는 조그마한 널빤지를 하나 갖고 교회 부설 야간학교로 달려갔다. 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다. 그렇게 글을 익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중학생들과 함께 수학 수업을 들을 정도였다. 월 회비 5원을 내기 위해 남의 집 쇠먹이러 가서 콩이나 보리를 줍거나,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팔아서 돈을 마련했다. 남는 돈은 저축해 결혼 밑천으로 삼았다.
양씨는 아버지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냇가에 물을 길으러 가다가 아버지 닮은 사람이 다가오면 아버지인가 하는 마음에 뒤를 졸졸 쫓아갔어요. 그러다가 할머니 집 골목을 넘어가면 ‘아버지가 아니었구나’ 하며 실망하고 다시 물을 길으러 가기를 여러 차례 했어요. 20살 무렵까지 그랬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며 “배토라진 가매기질 했다”(배가 뒤틀린 까마귀 노릇 했다)며 구박했다. 몇번이나 꿈속에 나타난 아버지한테 울면서 이야기를 했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날은 베개가 왈탕하게 젖었다. 베개에 머리를 묻고 우는 울음은 목구멍에서 심장으로 내려가 응어리졌다.
아버지는 삼성혈 인근 무덤가에서 양씨와 헤어진 뒤 군경에 붙잡혀 제주주정공장에 수용됐다가 무죄로 석방됐다고 했다. 그러다 누군가의 손가락질로 다시 붙잡혔다. 아버지는 1949년 7월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서울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뒤 행방불명됐다.
2021년 3월16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 수형 희생자 335명에 대한 직권재심에서 아버지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양씨는 4·3 당시 아버지가 형무소에 끌려간 사실은 고모부를 통해 들었지만, 얼마나 형을 받았는지는 몰랐다. 그날 양씨는 법원에서 재판장에게 “아버지가 행방불명돼 돌아가신 것은 알았지만 무기징역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너무 가슴이 아파 터질 것 같다. 무죄를 선고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팍팍한 환경에서도 부모에게 못 한 효도를 한다고 경로당에서 12년 동안을 밥을 짓는 등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2020년 3월 4·3 때 입은 부상 때문에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됐고, 당시 숨진 온 식구가 4·3 희생자로 인정됐다.
이제 그의 마음이 풀어졌을까. 양씨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깊다. 4·3평화공원에 처음 갔을 때는 눈물만 나고 숨이 탁탁 막혀 걷지를 못했다. 옆도 돌아보지 않고 와버렸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 익숙해지고, 눈물도 조금은 말라 살 것 같다고 했다.
“사람들 모여 있는 데 가기도 싫고, 텔레비전에서 4·3 이야기가 나오면 꺼버려요. 4·3 트라우마센터에서 오라고 해도 가기 싫었어요. 그때 일이 너무 생생해서 잠자다 깨면 그 생각이 먼저 나는 거예요. 이제는 익숙해질 법하지만, 그날의 일은 평생 잊지 못해요.”
75년 전 제주읍 노형리 정존마을에 살았던 아이는 지금도 매일이 4·3이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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