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살았지만 이런 산불은 처음…양말 한 짝도 못 챙겼다”
서울 인왕산 산불이 확산되던 2일 오후 서대문구 홍제동 인왕중학교 강당으로 임시 대피한 채임순씨(70)는 머리카락에 묻은 잿가루를 털어내고 있었다. 40년 동안 개미마을에 살았지만 이런 산불은 처음 겪는다는 채씨는 “집에서도 온통 메케한 냄새가 났다”며 “아직까지도 심장이 벌렁벌렁한다”고 말했다. 교회에 갔다가 통장으로부터 화재 소식을 들은 채씨는 급하게 집에 들러 지병 때문에 먹던 약을 손가방에 담아 나왔다. 그는 “양말 한 짝도 못 챙겼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 6부 능선에서 발생한 원인미상의 화재로 이날 인왕산 인근 주민들은 대피소에서 대여섯 시간가량 발을 동동 구르며 피신해 있었다. 이들은 진화 작업이 마무리된 이날 저녁 귀가했지만 놀란 가슴을 미처 다 쓸어내리지는 못한 모습들이었다.
불은 이날 오후 5시8분에야 초진이 완료됐다. 인명 피해와 민가 등 시설 피해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이날 오후 인왕산과 인접한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 등 인근 주거지 주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인왕산 입산도 통제했다. 인근 120가구 주민들은 홍제2·3동주민센터, 인왕중학교, 마을 경로당 등으로 대피했다.
개미마을 인근에 마련된 인왕중 대피소에는 오후 들어 주민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개미마을에만 60년 살았다는 유모씨(69)는 “주말이라 아들과 11세, 9세 손주가 집에 놀러 왔는데 갑자기 경찰이 집 문을 두드리며 나오라 했다”며 “밖으로 나와 보니 산쪽에 빨간 불이 나고 있었고 겁이 막 났다”고 했다. 유씨 역시 백팩 1개만 달랑 챙겨 나왔다고 했다. 그는 “손주들은 잠옷바람으로 나왔다”며 “그나마 조금 남겨놓은 돈도 못 챙겨 나왔다”고 했다.
초진 완료 1시간여 뒤인 오후 6시20분쯤 구청 직원은 대피 주민들에게 “귀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유씨는 잠옷 차림을 한 손자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짐을 싸들고 강당을 나서던 한 피난민은 “다행이다”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구청 직원에게 “수고했다”며 대피소를 나선 주민도 있었다.
산불은 개미마을에 직접 피해를 입히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마을 곳곳에는 메케한 냄새와 연기가 가시지 않았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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