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부은 반 잔, 일본이 부어야 할 반 잔

한겨레 입력 2023. 4. 2. 18:50 수정 2023. 4. 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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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일제 강제동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재판을 하다 보면 가끔 보게 되는 상황이 있다. 피고인이 무죄를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의적 책임을 진다’면서 피해자와의 합의를 시도하는 경우. 그럴 수 있다. 문제는 그 후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일부 피고인들은 유죄 판결을 선고받더라도 합의를 참작 받아 벌금형이나 징역형의 집행유예 등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게 되면 태도를 바꾸어 재판 결과는 모두 거짓이고 자신은 억울하며 피해자에 대한 도의적 책임조차 질 일이 없다는 식의 말을 한다. 피해자는 뒤늦게 분노하며 도리어 합의한 자신을 책망하기까지 한다. 그럴 때 느끼게 된다. 합의금이 지급되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에게 그것은 끝이 아님을.

피해자는 가해 행위의 불법부당성, 피해의 인정, 가해자의 사과 및 반성, 사실 왜곡의 중단과 명예 회복, 재발 방지의 보장 등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정의’의 내용이기도 하다. 위 ‘정의’의 개념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되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서부터, 유럽인권협약(1950), 자유권규약(1966), 인종차별철폐협약(1965), 미주인권협약(1969), 고문방지협약(1984) 등을 통해 꾸준히 인정되어 오다가 2005년 12월16일 대한민국과 일본이 모두 참여한 유엔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피해자 권리 기본 원칙’을 통해 재확인된 중대한 국제인권법위반·국제인도법위반 피해자의 권리는, ① ‘정의’에 대한 권리, ② ‘배상(reparation)’에 대한 권리, ③ ‘진실’에 대한 권리를 아우른다. 이러한 권리는 ‘반인도범죄 또는 국제인권법 위반 행위 사실의 인정과 이를 기반으로 한 책임의 인정’을 시작으로 하여 ‘향후 재발방지를 위한 기록의 보존과 제도 개선, 교육 실행’으로 이어진다. 금전적 배상은 일부에 불과하며, 그조차도 사실 및 책임의 인정이 수반되지 않거나 기록의 삭제, 사실의 망각, 교육의 왜곡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라면 피해자 권리로 인정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2018년 일본기업의 강제동원노동 인권침해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큰 진전이다. 그 당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실관계가 기록되고, 가해행위의 불법부당성 및 그에 따른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대한민국의 법에 따라 인정된 공적 문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공공연히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정부의 해석과 부합하지 않아 잘못되었고 국제법에 위반된 것이란 내용이 주장된다. 그것은 정말일까.

대한민국 법제상 국가 간 조약 내용의 해석 권한은 행정부가 아닌 사법부가 갖는다. 사법부가 2018년 판결을 내릴 때 조약 체결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사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2005년 일본기업을 상대로 소를 제기했을 때부터 2018년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로 재판을 종료하기까지 장장 13년 동안 재판을 했다. 그 기간 대법원은 우리나라 정부 및 일본기업과 함께 재판에 관한 밀담을 주고받기까지 했으니 우리 정부의 입장은 충분히 들은 셈이다. 그렇게 충실히 정부 측 입장을 듣고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하여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일본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렸다면, 우리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 관한 대법원의 해석에 따라야 한다. 그것이 법치주의다.

2018년 판결은 국제법에 반하는가. 주로 전후 처리 등을 위해 국가들 사이에 자주 체결된 ‘일괄보상협정’이란 것이 있다. 피해 국가가 자국민의 피해를 포함한 총체적 피해에 대한 책임을 가해 국가에 일괄하여 묻는다는 내용의 조약인데 국제법적으로 그 효력이 인정되어왔다. 2018년 판결이 국제법에 위반된다는 주장은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 통치 행위에 관하여 한국과 일본이 체결한 일괄보상협정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므로, 그 협정의 이행을 통해 일본의 불법적 식민 통치로 인한 한국 피해자들의 청구권(소구권)은 모두 소멸하였다’는 내용을 주로 한다. 그러나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다수의견(7명의 대법관)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불법성에 관하여 양국간 의사합치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으므로 식민통치 과정에서 발생한 불법적 인권침해에 관한 손해배상청구권도 위 협정의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국가간 일괄보상협정으로 국민 개인의 보상청구권이 소멸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국제법상 주류적 관점에 의하더라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당한 불법행위에 대한 일괄보상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일본기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위 협정으로 인해 소멸하지 않는다. 2018년 판결의 논리 자체가 국제법 위반일 수 없단 얘기다.

나아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한국과 일본 양국이 일본 식민 통치 및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행위의 불법성에 깊이 공감대를 이루어, 불법 식민 통치 및 인권침해 가해국으로서의 책임을 지기 위해 일본이 당시 조선인이 겪은 모든 피해를 대한민국에 일괄보상한다는 내용으로 위 협정을 체결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러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해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 자체가 소멸하지는 않는다는 판단(이 견해는 3명의 대법관이 취하였다)을 놓고 국제법 위반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한 피해자 개인의 권리는 국적국도 함부로 소멸시킬 수 없다는 법리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국제법의 흐름에 비추어 보자면 말이다.

2018년 판결에서 인정된 강제동원 피해의 실상은 이러하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전시체제에 들어가자 군수물자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에 매진하였고, 일본기업들은 이에 적극 동참하였다. 일본기업들은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노동조건을 기망한 거짓광고를 하거나 관을 매개로 조선인들을 알선받은 후 이들을 군수물자 생산 노동력으로 활용하였다.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에서 실제로 일하게 된 노동환경은 광고 또는 관의 알선·지시 내용과 다르게 매우 가혹했다. 사실상 감금 상태에서 안전조치 없이 매우 고되고 위험한 노역에 강제 종사해야 했다. 노동강도에 비해 현저히 적은 양의 식사가 제공되었고 휴식과 외출이 극도로 제한되었다. 피해자들에게는 고용관계를 종료할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고 도주 시도를 하다가 발각되면 심한 매질을 당하였다.

피해자들이 당한 인권침해는 한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권 존중은 인류 보편의 가치이고, 그 존중을 요구하는 것은 문명에 대한 호소다. 인권침해 피해자 권리를 존중한 우리 대법원의 2018년 판결은 국수주의적 판결이 아니라 문명의 발전에 부합하는 판결에 가깝다. 피해자들의 국적국인 대한민국이 인권침해 가해 기업들의 국적국인 일본과 사이에서 미래지향적 해결책을 모색할 순 있겠으나 이는 피해자 권리를 존중하고 우리 대법원의 관점에 부합하는 방향성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정부가 먼저 부었다는 반 잔에 대해 일본이 강제동원 인권침해의 존재와 그 불법부당성에 대한 인정, 사죄와 반성을 기초로 한 교육의 실행과 인권침해 기록의 보존으로 답하지 않는다면, 그 반 잔은 바닥부터 금이 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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