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연진이가 보고 싶다

이정국 2023. 4. 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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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더 글로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한겨레 프리즘] 이정국 | 문화팀장

얼마 전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한달 만이었나. 으레 하는 것처럼 “편찮으신 데 없으시죠”로 대화가 시작됐다. 오랜만에 한 전화가 너무 짧게 끝나는 게 싫어서였을까. “엄마도 글로리 봤어요?”라고 물었다. 전 국민적인 화제를 몰고 온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 말이다. 평소 드라마를 즐겨 보시고 송혜교의 팬이기 때문에 당연히 “봤다”라는 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게 뭐니?”라고 되물었다. 아뿔싸! 몇해 전 넷플릭스 애플리케이션이 깔린 스마트 티브이를 어버이날 선물로 드린 적이 있는데, 정작 사용법은 알려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대충 내용을 얘기하자 “재밌겠다, 보고 싶다”고 하셨다. 엄마는 <오징어 게임>도 못 봤다고 했다. 나도 이제서야 정주행을 시작한 <신성한, 이혼>(제이티비씨)을 챙겨 볼 정도로 드라마 애청자인 엄마가 <더 글로리>와 <오징어 게임>을 보지 못했다니. 하루가 멀다고 미디어가 “연진아”를 외쳐댈 때 누군가는 ‘연진이’의 존재도 몰랐던 셈이다.

전화를 끊은 뒤, 불현듯 ‘보편적 시청권’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보편적 시청권이란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대형 스포츠 경기나 행사에 대해서 국민 누구나 추가 비용을 내지 않고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접근 권리’를 말한다. 1990년대 유럽에서 유료 방송 채널이 급증하면서 월드컵 등 대형 경기를 보기 위해 비용을 내야 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등장한 개념이다. 나라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결국엔 저소득층이나 노령층 같은 정보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점은 같다.

한국도 2007년 방송법 개정을 통해 보편적 시청권 개념을 본격 도입했다. 2006년 한 케이블 스포츠채널이 국가대표 축구팀 경기를 방송 사상 처음으로 독점 중계했는데, 이것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결국 법 개정까지 이어졌다. 방송법은 보편적 시청권을 “국민적 관심이 매우 큰 체육경기대회 그 밖의 주요 행사 등에 관한 방송을 일반 국민이 시청할 수 있는 권리”라고 못박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반 국민’이라는 단어다. 케이블티브이, 아이피(IP)티브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가입자가 아니라 ‘일반 국민’의 권리라는 점이다. 티브이만 있다면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법 개정 취지와 달리 최근 보편적 시청권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그 중심에 오티티 같은 새로운 방송 플랫폼의 약진이 자리 잡고 있다. 오티티에서 제공하는 영상물은 방송법에서 규정하는 ‘방송’이 아니기 때문에 방송법에서 정한 보편적 시청권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더 글로리>, <나는 신이다> 등에서 보듯 이미 지상파 이상의 파급력을 가진 오티티는 자본을 앞세워 그 힘을 점점 키우고 있다. 2020년 쿠팡플레이는 도쿄올림픽 온라인 독점 중계권을 확보하려고 시도했고, 지난해엔 손흥민의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EPL) 출전 경기를 온라인 독점 생중계해 논란을 빚었다. 씨제이이엔엠(CJ ENM)의 경우 오티티 티빙 등을 통한 아시아축구연맹(AFC) 주관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의 4년간 중계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방송법으로 보편적 시청권을 보장한 대형 스포츠 경기도 이렇게 법망을 피해 ‘차별적 시청권’을 조성하는 상황에서 <더 글로리> 같은 드라마까지 누구나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굳어진다면, 오티티를 가입한 이들과 가입하지 못한 이들 간의 ‘정보 격차’는 벌어질 것이고 또 다른 사회 양극화 현상을 낳을 것이 자명하다.

지난해 12월 방송통신위원회가 펴낸 ‘2022 방송매체 이용행태조사’를 보면, 전체 국민의 오티티 이용률은 72.0%에 이르렀고 유료 이용률은 40%를 처음으로 넘겼다. 법률상 ‘방송’과 ‘온라인 플랫폼 동영상’의 경계는 무의미해진 지 오래다. 더 늦기 전에 오티티의 ‘사회적 책무’를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엄마도 연진이가 보고 싶다.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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