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 칼럼]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

한겨레 2023. 4. 2.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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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칼럼][장애인 기본권 보장]우리는 누군가의 이동을 방해했고 동시에 차별과 배제를 방해했다. 수억의 벌금을 내고 누군가는 구속되었지만 그렇게 우리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새로운 사회의 법과 제도를 만들어왔다. 그 기록을 묶어 책 <전사들의 노래―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 를 낸다. 기록되었으므로 잊히지 않을 것이다.
지난 3월23일 오전 서울 지하철 시청역에서 열린 ‘서울 420 장애인차별철폐연대 투쟁 선포 결의대회’에서 한 참석자가 하차하는 시민들을 향해 ‘모든 장애인도 똑같은 시민이다’ 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홍은전 | 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2020년 어느 날 혜민이 나에게 장애인운동가 생애 기록을 제안했다. 혜민은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기록하는 인터넷 언론사 <비마이너>의 편집장이다. 우리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활동가들을 인터뷰해 기록하기로 하고, 이 작업의 예산을 공모사업에 신청했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탈락이었다. 나는 “나중에 다시 신청해서 선정되면 하자”고 했다. 당연히 혜민도 그러자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진지하게 당장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모금을 해서 돈은 어떻게든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다. 나는 영 내키지 않았다. 모금이 잘 안되면 가난한 언론사에 부담이 될 테니 글 쓰는 내내 불안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안 하고 싶어서 그렇게 급하게 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혜민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사이에 누가 죽을까 봐 무서워요.”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말했다. “재작년에 ○○님이 갑자기 쓰러지셨을 때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지금 돌아가시면 안 되는데… 그분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없는데… 그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20년간 이 운동을 이끈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지면 이 운동의 한 축이 증발해버리는 느낌이에요. 기록되지 않은 건 존재하지 않은 게 되니까.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온 사람들인데, 인터뷰 기록 하나 없다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나보다 10년쯤 후배여서 신입 시절 어리바리했던 혜민을 기억하는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의 눈을 피한 채 생각했다. ‘얘가 언제 이렇게 멋있어졌지….’ 아주 가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나는 혜민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 해보자!”

평범한 비장애인으로 살다 장애인운동을 만나 인생이 바뀐 우리에겐 강력한 공통감각이 있다. 혜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것이다. “내겐 소중한 사람이 언론에서 그저 ‘불쌍한 장애인’으로 취급되는 건 무척 모욕적이었다. 세상의 말과 글에 반격하고 싶었다. 장애인운동은 싸우는 만큼 세상이 나아지고 가장 약한 곳에서 세계가 확장된다는 믿음을 안겨줬다. 경이로웠고 황홀했다. 차별받은 존재가 저항하는 존재로 변신하는 일을 이 사회의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2020년부터 6명의 생애를 기록했고 이듬해 길고 긴 이야기를 연재했다. 연재가 끝날 무렵 전장연은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시작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전장연이 왜 매일 아침 8시 지하철에 오르게 됐는지를 알리는 장대한 서사가 되었다.

2001년 서울 광화문에는 이전에는 한번도 등장한 적 없던 어떤 인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쇠사슬로 몸을 묶고 서로를 연결한 채 8-1번 버스를 점거한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장애인도 인간이다. 이동권을 보장하라!” 내가 충격을 받은 건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라는 언뜻 소박해 보이는 구호는 실은 장애인을 배제한 이 문명 전체를 문제 삼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작 버스’조차 탈 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거대한 세상에 맞선다는 건 얼마나 답이 없는 일인가. 그러니 사람들은 문제를 보고도 문제를 덮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2001년 내가 만난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을 문제 삼고 실패할 것이 분명한 싸움을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저항하는 장애인들에게 둘러싸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우리는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웠다. 당장 가야 할 길이 막힌 사람들이 길길이 날뛰며 우리가 법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참 이상한 말이었다. 장애인은 어길 법조차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 발짝만 내디디면 벼랑 끝인 이들에게 이 사회는 신호를 지키라고 했다. 그러나 선을 넘지 않고서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열차를 막았고, 동시에 어떤 죽음을 막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동을 방해했고, 동시에 차별과 배제를 방해했다. 우리는 선량한 시민들의 발목을 잡았고, 아프고 늙고 가난한 사람들을 버리고 폭주하는 야만적인 사회의 발목을 잡았다. 수억의 벌금을 내고 누군가는 구속되었지만 그렇게 우리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새로운 사회의 법과 제도를 만들어왔다. 그 기록을 묶어 책 <전사들의 노래―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4월 출간)를 낸다. 전장연의 일원으로 살았다는 게 인생의 자부심인 내가 우리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어 큰 영광이었다. 많은 사람이 읽어주길 바란다. 기록되었으므로 잊히지 않을 것이다.

※ 이 지면에 쓰는 마지막 글입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실어주고 읽어주신 <한겨레>와 독자분들, 말과 글로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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